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40년전쯤 내가 초등학생(국민학생)때 본 신문 칼럼이 아직도 생각난다. 한국에 오래 산 중년의 프랑스인이 쓴 글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한국인들의 지나친 일본 혐오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이 일본에 당한 것은 과거 프랑스가 독일에 당한 것에 비하면 훨씬 작다. 현재 프랑스는 독일과 잘 지낸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한국인들은 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이웃나라 일본과 건전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 프랑스인이 답답했다. 프랑스야 독일과 서로 치고 받았지만 우리는 일본에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그런 혐오가 생겼고 이를 외국인이 이해 못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일면 외국인이 보면 - 제3자가 보면 - 우리의 일본 혐오가 특이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런 일본 혐오를 반이성적, 반과학적인 '종족주의'라고 규정한 분이 이영훈 교수다. 이 교수는 한국경제사 부문의 최고 거장이며, 최근에는 좌익 민족주의 역사관에 치우친 우리나라 역사관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대한민국 이야기'는 2006.2월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을 이 교수가 교육방송에서 몇회에 걸쳐 요약 소개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재인식'은 1979~1989년 6권으로 편찬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인식)'을 이 교수 등이 뜻을 모아 탈민족과 문명사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재인식'에서 이 교수는 "내가 머리에 그리는 문명사의 출발점은, 그리고 언제나 다시 돌아오게 되는 마음의 고향은 분별력 있는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 그 인간 개체이다" 라고 하였다. 이 교수는 지난 50년간 한국의 난폭한 민족주의 역사학이 20세기 한국사의 기본줄기를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해 왔던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누가 이 나라를 반쪽짜리 나라, 잘 못 세워진 나라라고 하는가? 해방된지 77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나라가 정상인가?
이 교수는 대한민국이 역사 문제로 몸살을 앓는데, 몸살의 원인은 잘못된 역사관이며, 역사관을 밝고 건강하게 고치면 그 몸살은 금방 사라진다 라고 말한다. 잘못된 역사관은 지난 130년간 근현대사를 오욕의 역사로 가르친다.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문화의 조선왕조가 강도 일본의 침입을 받았고, 이후 민족 반역자 친일파들이 활개를 친 시대가 왔다. 해방은 또 하나의 점령군인 미국이 들어온 것에 지나지 않고, 친일파들은 재빨리 친미 사대주의자로 모습을 바꾸었다. 민족의 분단도, 한국전쟁도 이들 민족반역자 때문이다. 이후 1950년대 이승만 정부,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도 이들이 지배한 반역의 역사다.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나 정신은 잃었다. '역사에서 정의는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불의의 역사다(노무현 대통령)".
이 교수는 이 책에서 현행 중고교 역사교과서에까지 깊이 침투한 이 같은 잘못된 역사관이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안적 역사관을 제시한다. '민족'은 수천년 전부터 존재해 온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20세기에 들어 일제의 억압을 받는 가운데 한반도 주민들이 발견한 정치적 공동체의식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오욕의 역사라면 이는 민족을 역사의 기초단위로 하는 민족주의 역사관의 주장일 뿐이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우리의 근현대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의 단위를 살아 있는 개별 인간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역사란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고 필부필부의 삶의 이야기다.
평범한 개인의 삶의 이야기로 역사의 기초를 바꾸면 지난 20세기는 한반도에서 국가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심각한 변화와 발전이 있던 시기다.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해졌고, 경제적으로 풍요해졌다. 빈곤과 질병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러한 세기적 변화의 기초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고, 경제적으로 자유시장경제이다. 사상적으로는 개인주의 내지 자유주의다. 그 모두가 서유럽에 기원을 둔 외래문명이다. 20세기의 한국사는 이러한 외래문명이 들어와 우리의 오랜 전통문명과 상호작용하며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역사관으로 20세기 한국사를 재해석해 본다. '민족'이라는 것이 20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었음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토지의 40%를 빼았고 매년 쌀의 50%를 실어 갔다는 식민지 수탈론은 1960년대부터 한국의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친일파라는 존재도 대부분 테크노라트형으로 신구 두문명의 접합 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중산층이자 지식층이다. 일제시대(일정기)를 통해 근대라는 인식이 우리 개개인에게 스며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국 위안부 문제도 198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에 깊숙이 침투한 군에 의한 여성이 성 약취방식에 하나다. 공개된 구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민족의 분단을 서두른 것은 소련의 스탈린이다. 한국전쟁은 미국과의 냉전에서 승기를 잡고자 소련이 승인하고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실천한 국제전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온갖 비방도 '나라세우기'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애초부터 그와 대립한 좌파들의 중상모략에 불과하다.1950년대는 허무와 절망의 시대만은 아니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적지 않은 성취의 시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가? 이 교수는 개항기 이래 외래문명을 이해하고 실천해 온 문명개화파의 후예들이 주도해 세운 근대 국민국가라는 역사상을 제시한다.
이 교수는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데 요구되는 또 하나 전제조건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인간정신의 본질은 자유다. 중세인들은 역사에 종속되어 살았다. 개인은 기일과 명절에 제사를 지키고, 나라는 대사가 생기면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죽은자의 혼령이 산 자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중세였다. 근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죽은 자로부터 해방되었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발목을 잡는 행위는 근대와 더불어 단절되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중세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이 지독하게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것,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화학 등 세계 굴지의 대기업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