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자의 다른 저서인 만들어진 신을 감명깊게 읽었는데, 그보다 앞서 유명세를 떨친 이기적 유전자는 이제야 접하게 되었다. 영어 원제인 selfish보다, '이기적'이라는 한글이 좀 더 나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것 같아 아쉽지만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흐름을 쭉 따라가다 보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역설적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타적인 여러가지 생물들의 행동들도, 결국 생명을 유지하려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발현된 것들이라는 주장이 이 책의 핵심이다.
사실 처음에는 나도 막연한 이질감이 들었다. 다른 행동들이 생물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건 쉽게 납득이 갔지만, 스스로를 희생하며 남을(다른 개체를) 돕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도 사실은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다른 동물이나 생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인간에 한정해서 생각했을 때, 사람의 선한 마음이라는 것은 굉장히 고차원적이고 훼손해서는 안되는 높은 가치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깔려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가 초기에 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나는 저자의 논리에 완전히 설득당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예를 들어 생각해 보았는데, 드라마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그것도 결국 니가 좋아서, 니 마음 편하자고 한 행동 아냐?"라는 대사가 그것이다. 보통은 이런 공격?을 받은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나는 순수한 선의로 도와준 것이다 라는 식의 변명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더 깊게 파고 들어가보면 결국 본인이 원해서, 본인이 남을 도와주는게 마음이 편하고 장기적으로 본인에게 물질적이든/심리적이든 더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맞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평소에도 했던 생각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래, 본인이 원해서,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했다고 해도 뭐가 문제지? 라는 쪽으로 생각이 발전했다. 오히려 저자가 말하는대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행동들은 보다 강력할 수 있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해 고귀한 가치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고, 저자가 생물학적으로 분석한 결론이 그렇고, 책을 읽을수록 나 또한 저자의 생각에 십분 동의하게 되었다.
경영학에는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해 놓은 것인데,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로 생리적 욕구는 가장 기초적이고 원시적인 욕구이며 자아실현 욕구로 갈수록 더 높은 단계의 고차원적인 욕구라고 정의한다. 경영학적으로는 마케팅, 노사관리 등에 의미가 있는 구분이지만 적어도 이 책의 저자와 같은 과학자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론일 것이다. 먼저 소속 욕구와 관련해,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가 던지는 의문이 있다. 우리가 단체를 위해 행동한다고 가정하면, 그 단체의 범주는 우리 나라인지, 포유류인지, 동물인지 등등 생물학적으로 정의하기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다. 과연 사자가 사슴을 보며 같은 포유류목에 속하는 동물이니까 우리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슴을 공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까? 우연히 사자가 사슴을 공격하지 않는 상황이 목격될 때 그렇게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또 보통의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은 욕구단계이론에 따르면 존경 욕구 혹은 자아실현 욕구에 해당할텐데, 아마 저자는 모든 것은 유전자의 이기적 동기에 따른 행동일 뿐 욕구를 단계별로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할 것 같다.
핵심은 저자가 말하는 유전자 이기성의 목표는 유전자 자신을 후대에 남기려는, 지속하려는 욕구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유전자를 지속시키려는 유전자 조상들의 이기적인 노력에 따라 만들어진 생물체이다. 지속성 없는, 즉 이기적이지 않은 유전자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기적인, 지속성 있는 유전자에 비해 덜 선택되어 소멸될 것이다. 살아남으려는 수천년에 걸친 유전자들의 노력 덕에 지금 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저자의 지식과 서술 능력에 감탄하며 이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