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에서 계속..
세계의 끝을 읽고 나에게 다가온 느낌은 다음과 같다.
나는 "세계의 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를 맞이한 문지기는 세계의 끝에서 나에게 "꿈 읽기"란 직업을 주었다. 그것을 위해 나의 눈을 수술했는데 그것은 빛을 보면 고통을 느끼도록하기 위한 것 이다. 문지기는 또한 나와 그림자를 분리하였다. 그림자는 문지기와 함께 구속되었고 나는 도서관이 있는 마을로 들어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일각수의 두개골에 저장되어 있던 꿈을 읽게 되었다. 나는 빛에 대한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낮에는 나의 숙소에 머물고 밤이 되어서야 도서관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나는 그림자와 헤어지게 되고 빛에 고통을 느끼게 된 불편한 환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마을의 지도를 그리고 탈출구를 찾으려 시도하며 점차 마을과 발전소와 숲에 고착된 사람들의 관계를 알게 된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영원하고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다. 대신 그들은 그들의 그림자와 사별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잊어 버리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성되게 되는 주민들의 마음은 일각수의 두개골에 저장되고 꿈 읽기를 통해 소멸을 시키는 결과로 마을의 주민들에게 마음이 없는 대신의 안온한 환경이 제공되게 된다. 마음을 간직하길 원하는 사람들은 마을에 들어 올 수 없었다. 그들은 숲으로 추방되어 추위 등 한층 고단한 환경을 견뎌야 했다. 또하나 불완전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마을과 숲의 경계면에 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마을의 평안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림자와 함께 탈출할지말지를 고민했다. 즉, 마음과 그림자를 버리고 평안한 환경에 영원히 있을지 아니면 버리지 않고 숲으로 추방될지를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그림자만 세상의 끝에서 탈출시키고 나의 마음을 지켰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끝'은 내가 만든 세상이니까.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왜 이렇게 소설의 틀을 구성하면서 독자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는지를 나는 이 순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우선 우리가 공존하는 이 세상은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우리에게 메시지로 던지는 것 같다. 불교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던가? 실재는 다른 세상인데 우리가 착각속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다. 실재하는 세상의 한 예로서 그는 "세상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으로 마음으로 표현되는 나의 정체성이다. 그는 "나에게 마음이 없다면 나가 아니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같다. 때문에 추위, 배고픔 등으로 살기 힘든 숲의 환경에 살 수 밖에 없더라도 마음을 지켜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에게 마음은 무엇일까? 이성일까? 아니면 이성으로도 느끼지 못하는 자아일까? 잘...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크게 공감을 한다거나, 감동을 한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직 없다. 아주 재미있었다. 하는 느낌도 없다. 단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니까. 그 내용이 궁금해서 그의 세상에 대한 인식이 궁금해서 끝까지 읽게 된 것 이다. 다 읽고 난 지금 그저 이런 환타스틱한 작품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1Q84"도 그렇고 '기사단장 죽이기"도 그렇고 그의 소설은 환타스틱하면서도 다소 기괴한 내용을 담는 것 같다. "1Q84"에서는 달이 2개가 뜬 세상을 그린다. 달이 2개가 뜬다면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뭔가 기괴한 소리가 나는 동굴이 있고 나는 그 동굴 속에서 기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왜 그런 동굴을 내용에 넣은 것 일까? 동굴 속에서의 기괴한 체험이 주는 메시지는 또 무엇일까? 나의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아"를 그렇게 표현해 보는 것 인가?
아무튼 기억이 남아있는 동안 이 책의 내용은 나에게 과연 무슨 의미였던가를 짬짬히 생각해 볼 계획이다.
다음 계획 :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해변의 카프카(2002년, 그의 나이 54세)"를 마지막으로 읽어 볼 생각이다. 그 책마저 읽은 다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해 볼 작정이다. 아마 아무생각도 없을꺼라는 예상에 현재는 한 표를 던지겠다는 마음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