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 뿐이다. 결코 죄고 싶은 사람이 다 될 수 없고 원하는 삶을 모두 살아 볼 수도 없다. 배움도 한정적이다. 삶의 시간이 그렇다. 삶의 기회라는 것이 그렇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항상 모든 것을 경험하고자 한다. 그 이유를 작가는 자기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경험의 모든 변수들을 다 느껴보고 싶어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이 사고에 기반해 이 책은 시작한다.
주인공의 현재 상황은 완전 바닥이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세상과 온전히 고립되어 있다 느끼며 외로움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 12년 동안 일했던 가게에서 해고 당하고 오빠와 관계가 안 좋아진 원인을 자기 스스로에게 찾으며 다시 또 절망한다. 수영을 포기했던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고 유일한 단짝이었던 지금은 관계가 소원해진 이지와의 연락마저 쉽지 않다.
유일한 피아노 수강생인 리오마저 엄마가 그만둬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옆집 사는 배너지씨는 몸이 쇠약하신 분이다. 약국에서 약을 타오는 일로 도와 드리고 있었는데 약국에서 일하는 청년이 약을 가져다 주기로 했다며 더 이상 노라가 필요 없음을 통보한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아무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가 이 우주에서 불필요한 존재임을 느꼈다. 그녀에게 이번 삶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수영선수, 뮤지션, 철학가, 배우자, 여행가, 빙하학자 그 중 어는 것도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살을 선택했다. 자살을 시도한 후 노라는 어딘 가로 이동했다. 손목에 찬 디지털 시계는 00:00:00을 가리켰다. 자정이었다. 실내에 불이 들어오자 노라는 자신이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렸을 적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엘름 부인을 보았다. 엘름 부인은 노라에게 이 곳은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이며, 이도 저도 아닌 자정의 도서관, 즉 책 제목 미드나잇라이브러리라고 알려준다.
거기엔 후회의 책이 있었고, 그 안엔 노라가 살면서 후회했던 모든 순간들이 적혀 있었다. 엘름 부인은 노라에게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모든 삶은 지금부터 시작이고 어떤 삶으로 이동했을 때 그 삶에 실망하는 순간 이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며, 이 일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첫 번째로 택한 삶은 과거에 헤어졌던 댄이라는 남자와 그 남자의 꿈인 펍을 같이 여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 삶 속에서 둘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댄은 바람을 피웠고, 장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이 생에 안에서도 후회는 계속되고 있었고 살만 한 노라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지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삶 속에서도 이지의 죽음을 알게 되고 슬픔에 다시 돌아왔다. 수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 삶에서는 엄마 아빠는 이혼을 하셨고 엄마는 돌아가셨다. 오빠와의 관계는 가깝다기보다는 비지니스 관계에 가까웠고 이 삶 역시 노라가 기대하던 사랑은 없었다.
기후변화를 위해 북극권의 연구소에 있는 삶에서 노라는 위고를 만났고 그는 알고 보니 노라와 같은 삶의 선택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어 300번의 삶을 계속했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 삶 속에서 노라는 곰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순간 자신이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노라는 위고가 아직 원하는 삶을 못 찾았다는 것에 슬퍼 했지만 이동자인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락 스타의 꿈을 이룬 삶에서는 무대에서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황을 잘 넘겼고 자신이 부르는 노래에 사람들이 내지르는 남성을 들으며 노라는 자신이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순간 깨닫게 되었다. 노라는 인터뷰도 하는데 그 인터뷰 내용이 참 인상적이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우주로 들어가요. 자신을 타인 그리고 또 다른 자신과 비교하며 삶이 달라지기를 바라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죠. 사실 대부분의 삶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는데 말이에요. 한 삶에만 갇혀 있는 동안에는 슬픔이나 비극 혹은 실패나 두려움이 그 삶을 산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런 것들은 단순히 삶의 부산물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특정한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겨 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슬픔이 없는 삶은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 사는게 훨씬 쉬워질 꺼에요.
슬픔은 본질적으로 행복의 일부라는 사실도요. 슬픔없이 행복을 얻을 수는 없어요. 물론 사람마다 그 정도와 양이 다르긴 하겠죠. 하지만 영원히 순수한 행복에만 머물수 있는 삶은 없어요.
이 인터뷰 내용이 결국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닐까? 모든 삶에는 슬픔이 있고 나의 슬픔은 내 탓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사람들은 우울의 터널을 조금은 더 쉽게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삶 속에서 오빠가 약물 과다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도서관을 돌아오게 되었다.
도서관으로 돌아온 노라는 더 이상 이 고통스런 경험을 계속하고 싶지 않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말에 엘름 부인은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며 죽음 또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임을 노라에게 알려 준다. 그리고 엘름 부인은 노라에게 이야기해 준다.
“체스에서 한번이라도 이기려면 무언가를 깨달아야 해.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나게 아니야. 넌 그걸 깨달아야 해. 체스판에 폰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경기는 끝난게 아니라 체스판에 폰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경기는 끝난게 아니야. 폰은 하찮고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폰은 차기퀸이니까. 넌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갈 방법만 닦으면 돼. 한칸 한칸 앞으로 나아가는거야.”
폰은 그저 줄이 아니라 차기퀸이고 앞으로 전진하면 된다는 말은 정말 마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어쩌면 그녀를 위한 완벽한 삶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딘 가에 틀림없이 살 가치가 있는 인생이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볼 가치가 있는 인생을 발견하려면 더 큰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걸 노라는 깨달았다.
그 후로 노라 시리는 수많은 삶을 살았고. 그 삶들 속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다가 애쉬라는 원래의 노라의 삶 속에서 친절을 베풀어 줬던 애쉬라는 의사와 결혼하는 삶 속으로 들어 갔을 때 자신의 딸을 마주하게 되었고, 결국 딸과 사랑에 빠져 캠브리지 교수로 살다 은퇴하고 지금은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삶 속에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 삶 속에서 노라는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번 삶 속에 애착이 생기고 두렵지만 마음을 열어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지 못한 과거 자신의 제자 리오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삶 또한 자신의 삶이 아니고 자신의 삶은 원래 자신 스스로가 일궈냈던 삶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나도 슬프고 아쉬웠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서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도서관이 무너지는 순간 살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로 원래 삶에 돌아온 노라는 옆집으로 달려가 매너지씨 댁에 간신히 가서 구조요청을 하고 결국 살아 남는다.
“절망의 반대편에서 인생은 시작된다.” 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노라는 그 수많은 삶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깨닫고 그 삶 안에서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려는 의지를 되찾았다. 그리고 결국 노라의 행복은 그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