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재위기간동안 정조는 많은 업적들을 남기었다.
기본 통치 이념을 민산, 인재, 융정, 재용 4가지를 잡았다. 이 기본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정조가 만들어 간 것은 수없이 많다.
그 바탕에는 명석함이 있었고, 그 명석함은 어릴적부터 계속된 정조만의 독서법으로부터 나왔다. 책을 두번 읽고 많이 읽기 보다는 깊이 읽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정조는 일단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한 번 익히고, 두번째로 다시 정독을 해서 그 책이 갖고 있는 내용을 깊이 파악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는 혜경궁인 어머니로부터 배운 독서법이다. 정조는 글을 읽을 때 미리 계획을 세워두고 읽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정을 보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읽고자 했던 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득록에 나는 하루에 어떤글을 몇번읽고, 어떤 글을 몇줄 읽는다고 반드시 과정을 정해놓고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만 둔적이 없다. 이는 문자 공부에 유익할 뿐 아니라 마음을 잡는 공부도 된다.
정조는 독서를 함에 있어 글 뜻을 깊이 음미하려면 참을성 있게 독서를 해야하는데 이를 잘 기억하려면 반드시 기록해놓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대목에 감동받았는지, 혹은 깊이 생각할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을 했다. 그 기록들의 상당수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는 독서에 있어서는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밀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을 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정조는 책을 읽을 때는 먼저 대요를 파악하라고 했다. 대요를 파악하면 만 가지 현상이 하나의 이치로 꿰어져서 반만 노력하고도 효과를 배로 거둘 수 있지만, 대요를 파악하지 못하면 모든 사물이 서로 연관되지 않아서 종신토록 힘써 외우고 읽어도 이루는 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인재육성이 조선의 개혁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 생각했고, 이를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그것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이란 역대 국왕의 어필과 초상화 등을 보관하는 동시에 왕실 소유의 다양한 서적들을 소장하기 위한 도서관도 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겉모습에서만 드러난 형태이고 실제 규장각 설치의 본래 목적은 바로 정조의 개혁정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다양한 정책을 개발하고 유학 및 실학의 발전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정조는 요임금을 따라서 자신의 임지만 만든 것이 아니라 도시 건설까지 이어졌다. 그 도시가 바로 수원 화성이다. 정조는 화봉삼축의 고사를 따서 모든 백성들이 풍요롭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혁신도시이자 자신의 친위도시를 만들기로 했고, 그 이름을 화성이라고 하였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요즘 개념으로 치면 철저한 혁신도시 건설이다. 화성 신도시라는 대도시를 만들어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업행위를 할 수 있는 혁신적 실험을 하고, 토지없는 백성들을 위해서 대규모 국영농장인 둔전을 만들어 안정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업기반을 조성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과거 200여년 전으로 돌아가면 겨울은 고통의 계절이었다. 솜옷을 입고 따스하게 살아가게 된 것은 채 몇 십년이 되지 않았다. 고려말에 문익점에 의해 목화가 보급되었지만 실제로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솜옷은 백성들의 의복이 아니었다. 그러니 겨울에 야외에서 일을 하면 얼마나 추웠겠는가
정조는 겨울을 이기면서 축성을 진행할 수 있는 특별한 조처를 내려주었다. 그것이 바로 기술자와 일꾼들에게 털모자를 선물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겨울에 정3품 당상관 이상만이 귀마개를 할 수 있었다. 털모자만이 아니라 기술자와 막일꾼들에게 솜옷도 하사 하였다.
화성을 축조하는 모든 인부들에게 정당한 급료를 지급했다. 이로 인해 10년 걸릴 성곽 공사를 3년도 채 되지 않아 완성하게 되었다.
리더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정조는 자중하도록 노력했다. 정조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했다. 또한 리더는 친인척을 멀리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핏줄이라는 이유로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을 부리다가 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조는 기득권의 저항을 막아내고 이들과 싸웠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윤범행이 파직되었다. 그는 수원 성곽의 도면을 잘못 올렸다.
조선 후기의 다른 왕들과 달리 정조는 군사력을 가진 왕이었다. 군사력이 왕에게 없다면 국왕의 힘은 무의미한 것이다.
정조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국왕의 지엄함을 보여 주었다.
리더에게 가장 힘든일이 있다면, 측근을 내치는 것이다. 홍국영은 천하를 호령했지만, 영원히 조정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홍국영이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국왕의 외척이 되어 왕과 권력을 양분하고 싶어 했다. 마침내 홍국영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 그가 정종의 왕비인 효의왕후를 독살하려 했던 것이다. 정조가 과감한 결단으로 권력을 농단하는 관료를 처단했을 때, 대다수의 관료들은 정조와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