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끌었던 장소는 우리에게 석굴암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석불사이다. 그 이유는 이곳에 대한 작은 특별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거슬러 수년전 첫째 아이가 6살 즈음 휴가를 잡아 경주를 여행할 때 이야기이다. 우선 불국사, 첨성대 등 신라의 대표 유적들을 둘러보고, 그 일정중 석굴암을 잠시 들러 본존불을 감상하기로 했다. 하필 그날이 휴일에다 또 '부처님 오신 날'인 지라, 올라가는 초입부터 도로에 차량들이 주차하듯 늘어서 있었다. 2차선 도로라 차량을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았고, 이번에 가지 못하면 다음에 언제 멀리 다시 오겠나 싶어 1시간 정도 개미처럼 조금씩 이동해 결국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 내려서도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거기서부터 석굴암까지 올라가는 길은 꽤 멀리 걸어가야했고 게다가 경사까지 높아 보였다. 결국 기다리다 유모차에서 잠든 둘째 아이는 집사람과 주차장 근처 그늘막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결국 나는 첫째 손만 잡고 석굴쪽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정보는 습기에 취약한 석굴 내부의 유지와 보존 목적으로, 관람객들의 호흡 등도 영향을 미치지 않게 투명 유리장으로 막혀 멀리서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석굴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 말로만 듣던 유리장은 보이지 않고, 직접 석불을 대면하고 그 주위를 한바퀴 돌며 관람할 수 있는 등 나와 본존불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습기 관리기법을 도입하여 문화재 관리상황이 변경되었다고 짐작하고 이를 기쁘고 다행으로 여겼었다. 철모르던 우리 첫째는 그 와중에 본존불의 무릎을 손으로 만지다가 관리하던 아주머니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며 돌아 나갈 때, 특별한 사실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다. 원래 평상시는 기존처럼 유리장으로 구분지어 있는데, 1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개방해 직접 본존불을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우리 첫째가 커서 이 사실을 기억할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던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날은 입장료도 무료였다.
저자를 포함해 지식인들은 석불사의 석굴과 본존불 등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최고의 아름다움', '감히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초자 입 밖에 내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오직 침묵 속에서 보내는 최대의 찬미만이 가능하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 등등 이를 말로 형용하는 것조차 부담을 느낄 정도로, 그 예술적 경이로움에 몸둘 바를 몰라하는 것 같아 보인다.
사실 이런 예술적 아름다움과 별도로 건축 측면에서도 그 속에 녹아있는 정교한 과학과 기술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놀랍다. 당시 일반적이던 자연석굴을 이용하지 않고, 반구형의 돔형태로 인공석굴을 축조하였다는 점이다. 현재와 같이 시멘트나 모르타르 등이 없던 시대에 한장한장 돌을 역학관계 등 힘의 균형을 고려하여 만들어낸 기술은 그 당시 통일신라의 놀라운 석조기술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불상의 크기와 석굴의 규모 및 배치 등 속에 숨겨진 정교한 수리관계에 경이로움과 경탄만 쏟아낼 뿐이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수차례에 걸친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석굴의 습기와 이끼 등으로 인한 문화재 파손 등은 현재의 과학기술로도 해결하지 못한 채. 기계설비의 의존한 강제적 습기제거가 수십년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럽고 반성해야 할 점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기계의 진동으로 문화재에 지속적으로 손상을 주고 있다는 점 등에서 근본적인 보존대책이 하루라도 빨리 강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번 답사기는 석불사 외에도 영주 부석사, 메밀꽃 피는 이효석의 봉평과 아우라지 정선, 청도 운문사 등에 대해서도 맛깔나게 쓰여있다. 이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진면목에 대해 알게 되고, 더 깊이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기회가 가지게 된 것 같아 매우 기쁘다. 다음 새로운 답사지도 함께할 것으로 약속하며, 왠지 모를 뿌듯함과 가슴 먹먹함에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