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서문 중에서...>
자살은 잘못된 것인가... '자살에 대하여'를 쓴 목적은 단순했다. 자살을 자유로운 행위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면서 그런 생각을 표현하는 어휘를 가능한 확장하는 것이었다.
자살이라는 주제는 강한 반발을 부르면서도 실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종류의 여지를 찾기 위해서는 다소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뉴스와 공개 토론뿐만 아니라 친구와 지인들도 자살과 자살자들에 대해 편협하고 뻔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점차 좌절감을 느꼈다. 우리는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해 연민을 갖고 이해하는 명확한 사고와 언어의 빈공함을 겪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자살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궁지와 한계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가장 잘 아는 방법인 글쓰기로 무언가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어떻게든 잘못된 것으로, 도덕적 실패를 표출했다고 보면서 인생이 어떻게든 어그러진 것으로 여겨지는지의 문제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것이 혼란, 격분, 거침없는 말들, 꽤 자주 특이하게도, 완강한 침묵 같은 이상하고도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점에 큰 흥미가 생겼다. 나는 자살 금지 뒤에 있는 역사적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에 대해 더 주의 깊게 읽을수록 자살 금지의 도덕적, 법적틀은 자살을 죄악으로 보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중세 기독교 신학과 형이상학으로, 특히 삶은 신이 준 선물로서 우리에게 사용할 권한은 허락되지만 우리 삶을 통치하거나 지배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권력을 갖는 것이다. 그 신이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삶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극히 일부 사람들만이 앞서 말한 기독교적 형이상학이 참이라고 여기겠지만, 어쨋든 그것은 자살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법적 사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극단적이고 혼란스러운 반응을 일으킨다.
자살 금지에 대한 신학의 역사가 더 제대로 이해되고 해면되면, 권리와 의무와 관련해 자살에 대해 이루어지는 세속적인 논의가 흔히 부적절하고 개념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게 더 쉬워진다. 괘 길게 이어지는 2부에서는 바로 그런 시도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합리성과 자율성에 대한 의심스러운 가정에 좌우되는 자유주의적 주장도 비판한다. 나는 신, 군주, 국가나 공동체의 통치권이 자살 금지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철저히 반대한다. 자살할 어떤 권리든, 단순한 합리적 선택이나 자명한 시민의 자유로서 지지하는 자기통치권 주장도 의심스럽다. 팩의 논쟁적인 부분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그다음에는 주목을 끄는 별개의 문학 장르로서 자살 유서를 신중하고 냉철하게 검토해보려 했다. 모든 자살에 유서가 남겨지는 것은 아니며 - 유서가 없는 경우가 많다 - 자살 유서는 흔히 전적으로 예측할 수 있고 사실상 정형화된 수사 양식을 따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신뢰성은 필시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살 유서는 극심한 정신적 질병과 자살 성향이 있는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보이는 명백한 터널 시야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기이하게 매혹하며 나를 포함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외설적이라고 할 만한 매력이 있다.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은 "자살의 상세한 사실들은 우리의 상상을 어두운 방식으로 끌어당긴다"고 말했다. 자살은 전혀 건전하지 않지만 주의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한 현상이다. 자살 유서의 가장 강렬한 특징은 우울증에 의한 고립화 그리고 피학성과 가학성, 더 중요하게는 증오와 사랑의 극단적인 과시 행위라는 특별한 정신적 양가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인 것 같다. 자살 유서에서, 가장 강렬한 자기증오는 가장 극단적인 사랑의 외침을 불러일으킨다.
이로부터 나는 보복의 수단으로서, 박해받는다는 희생의 환상과 나르시시즘적 자기정당화를 토로하는 방식으로서 자살을 살펴본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