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서, 어떤 마무리를 해나가는 책속의 모습이, 감정까지도 실제 대하는 것보다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면의 고백을 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른가 보다. 다른 때와 달리 자세를 똑바로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너무 애를 쓰지도 않고, 창을 마주하고 편하게 앉아 아침마다 읽어보았다. 책갈피도 하지 않았다. 어제 여기까지 읽었고 오늘은 여기부터 시작하고, 무엇을 읽었었더라 복습도 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가다 한번씩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보니 그간 무심히 보고 지나쳤던 풍경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항상 이 자리에 머물수 없을텐데 그리고 기억은 언젠가는 점점 희미해지고, 또 완전히 없어질 때도 있을텐데, 한번 이런 느낌을 후기 삼아 적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여기 사무실 자리는 비교적 높은 층의 서쪽 창가에 접하여 있다. 창문이 넓어 바깥이 아주 잘 보인다. 아침에는 햇빛이 바로 비치지 않아 밖을 내다보는데 지장이 없다. 고맙게도 건물 옆에 큰 나무가 서 있어 창가에 가지가 뻗어있기 때문에 여기 근무하는 동안 계절의 오고감을 나무가지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 4층 높이까지 가지가 높이 뻗을 수 있는지 몰라도, 초록의 잎파리들을 매달고 있다가 붉게 물들이고 그리고 떨어뜨린다. 지금은 잔가지들이 가느다랗지만 꼿꼿하게 뻗어 있으면서 창문 밖 겨울바람을 버텨내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힘이들어 숨찰 정도인 이 높이까지 어떻게 저 아래 밑의 땅속에서부터 수분을 끌어올려, 모든 가지에 물을 나누어주고 잎파리를 만들어 내며, 색깔까지 끌어올려 그 잎파리를 푸르게 물들일 수 있을까.
눈길을 돌려 저 아래를 내려다보면 소방서가 있다. 아침마다 소방차들이 앞 공터에 나와 비상등을 켠다. 묵직한 차량들 사이를 주황색 제복을 입은 소방관들이 분주히 오간다. 아마 점검을 하는 듯하다. 여름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리프트를 높게 올리고 물을 뿌리기까지 한다. 낮의 어떤 때는 방호복을 입은 소방관들이 소방차 주위를 맴돌며 왔다갔다 하고 소리도 지르는데, 육중한 소방차와 노란색의 철모를 쓰고 형광색의 방호복을 입은 소방관들이 있는 모습을 보면 치 레고블록의 세트를 보고 있는 것같다.
저 멀리에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격인 건물이 서 있다. 멀리서 고속도로를 타고 진입하다보면 다른 어느 건물보다 알아보기 쉽다. 더군다나 트윈타워이다. 좌우 동형의 고층건물 둘이 서있다. 주로 행정기관들이 모여있는 이곳의 특성상 높은 건물이 많지 않으나, 유독 저 건물은 매우 높은데, 아마 30층은 될 것같다. 그 이상이 될 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높은 건물도 나에게는 30층 이상은 생각하기가 쉽지않다. 아마, 종로에 처음 왔을 때, 31빌딩을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아주 아주 높다는 생각을 했던 순간, 그순간이 내게 높다는기준을 정해준 것 같다. 요즘은 종로를 나갈 때가 별로 없다. 지금 그 빌딩을 들어가면 어떤 모습일까. 예전에 내가 들어가던 현관 아마 회전문이었던 현관문, 영업부 안 에스컬레이터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을까, 식당까지 올라가던 엘리베이터, 점심시간에는 타기가 매우 힘들었었다. 투덜대며 오르내리던 때도 있었고, 한 때는 30층 계단을 누가 먼저 걸어서 올라가는가 하는 시합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서는 저 트윈타워의 랜드마크 역할이 꽤 좋은 인상을 주었던가 보다. 더 멀리 전철역 주변에 고층건물이 최근 완공되었는데 거기도 똑같은 형태의 건물 두개가 섰고 이번에는 꼭대기가 고층다리로 연결되어있다.
오래된 낡은 것을 허물고, 새롭게 야심차게 지어졌을 수도권 신도시의 아파트에도 리모델링 조합의 동의를 구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조합원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어느덧 이름만 새로운 곳이 되었지만 이곳 수도권 신도시의 반듯하게 구획된 보도를 걸어다니는 것은 이 곳에서 누릴 수있는 최고의 기쁨이다. 철따라 피어나는 꽃과 초록의 향연, 형형색색의 나뭇잎들이 물들어가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눈으로 덮이는 모습을 감상하는 호사를, 왠만한 도심 거주지에서는 누릴 수 없다. 이 곳 신도시의 선물이다.
즐겨 산책하는 길에는 큰 길 하나를 두고, 초등학교가 2곳이 있다. 하교 시간에는 마중나온 엄마들, 할머니들 더러 할아버지들이 저마다 아이를 기다리고 서 있다.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엄마를 만난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간다. 무엇이 화제일까. 한동안 꽤 오랫동안 그런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어 잘 추측이 안된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신도시임에 틀림이 없는 곳 같다. 새로운 추측으로 생각을 인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뿐 아니라 낮에는 유모차를 밀고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엄마들의 모습을 아마도 다른 곳보다 많이 볼 수 있는 곳도 이곳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아이와 눈 맞추고 아이 말에 맞장구치고 아이의 언어로 자신을 낮추고, 아이와 노는 엄마의 모습이 언제봐도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