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내용 중 레닌(본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1870-1924)의 망명 생활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 적어보고자 한다.
레닌은 20대에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과 활동으로 1년의 징역형과 5년간 유배형을 치른 후,
[5년간의 유배생활은 러시아에서의 유배, 유형이라 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열악한 자연환경, 견디기 어려운 생활조건, 혹독한 노동의 강요, 굶주림 등의 생활 여건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레닌은 유배생활 중에 오히려 더 많은 독서와 이론적 정리, 사색을 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잔병치레가 많은 레닌은 등산과 사냥, 수영과 같은 레져 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같은 동맹회원이며 약혼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유배지까지 그를 따라왔는데, 그녀의 도움으로 그는 '귀족유배생활'을 한층 더 편하게 할 수 있었으며, 1898년 유배지에서 그녀와 결혼했다. 그곳에서 주요 저작인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이상은 (www.unamwiki.org 참조)]
황제에 대항하는 운동을 지속하다가 1900년 서유럽으로 1차 망명을 한다.
망명 후 뮌헨에서 '이스크라(Iskra, 불꽃)'를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하던 레닌은 활동의 제약을 피해 런던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로 옮겼갔고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1907년까지 계속된 내전 등 혼란 상태에서 노동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며 다시 2차 망명 길에 오른다. 이후 1917년까지 약 13년간 유럽에 머무르던 레닌은 2월혁명 이후 이른바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돌아오는데, 이 책은 레닌이 1917년 4월 러시아로 돌아오기 직전의 스위스 취리히에서의 시절을 간결하지만 단호한 필치로 그림으로써 레닌이 지녔을 법한 혁명가로서의 내면의 역동성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묘사하고 있다.
레닌은 처와 전혀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한다. 한 집에 사는 사람들도 가늘게 찢어진 그의 눈이 날카롭고 어둡게 빛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방문객이 찾아오는 일도 드물다. 그는 규칙적으로 매일 아침 9시에 도서관에 가서는 정오까지 있다. 그러다가 정확히 12시 10분에 집으로 돌아오고 1시 10분 전에 집을 나선다. 다시 들어가서는 저녁 6시까지 앉아서 책을 읽는다.(본책, 327쪽)
이 시기의 스위스의 주요도시는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그야밀로 비밀임무를 띄고 나타난 스파이들의 정보전이 세계 그 어디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정보 요원들은 많이 읽고 공부하는 외로운 이 사람이 나중에 세계를 혁명으로 몰아갈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이 볼품없는 사내에 대해 한 줄의 보고서도 쓰지 않은 채, 말 많은 사람들만 지켜본다. 사회주의자들 마저도 그가 런던에서 과격한 성향의 러시아 망명자들이 펴내는 작은 잡지의 편집자였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금기시된 특정 당의 지도자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가 사회주의 정당에서 가장 추앙받는 인물들을 가차 없이 경멸에 찬 태도로 질타하며 그들의 노선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데다가 붙임성이 없고 공손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상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가끔 저녁때 작은 프롤레타리아 카페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곤 한다. 고작 15명 내지 20명 정도가 모이는데 대개는 젊은이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괴짜 역시, 탁자를 앞에 두고 무질서한 토론을 하며 때때로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열을 올리는 여러 러시아 망명객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 아무도 엄격한 표정의 작은 사내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본책,328쪽) 스케치는 이것으로 간단하게 마친다.
그렇게 간소한 생활을 이어가던 레닌은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마침내 바라던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 혁명이 자신이 그리던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차르에 반대하는 궁정내부의 반란이라는 사실을 접하고는,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는 독일 수뇌부에 독일 영토를 기차로 통과하는 조건을 놓고 협상을 벌인 후, 유명한 '봉인열차(sealed train)'를 타고 독일, 스웨덴, 핀란드를 경유하여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다.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레닌에 대하여 할애하고 있는 본 책에서 귀환 전후 및 러시아혁명을 전후하여 제기되고 있는, (레닌의 혁명 의지의 진정성이나 순수성 대신 권력욕이나 무자비한 지배욕을 의심케하는) 레닌을 위시한 볼셰비키당에 대한 독일제국의 자금, 무기 등 지원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본책은 레닌에 우호적이고, 레닌이 독일과 은밀하게 협조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저자의 견해를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독일의 자금이 볼셰비키에 유입된 증거는 어느정도 밝혀져 있고, 레닌이 독일의 이해를 자국의 이익보다 우선했다고 의심할 만한 (특히,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한 러시아 영토의 할양)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이 러시아가 식량난, 물자난 등으로 거의 무정부 상태에 있다고 할 정도로 내부 혼란이 극심하였고, 전선에서는 병사의 이탈이 이어지며 군대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으며, 러시아의 동맹국(영국 및 프랑스)들은 볼셰비키의 반대당에 대하여 제각각 자금, 무기 지원을 하고 있어 레닌도 혁명을 위한 자금지원은 절박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해와 러시아와는 휴전하고 전선을 영국과 프랑스로 한정시키려는 독일의 이해 관계는 쉽게 일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더 개연성있는 해석일 것이다.
또한 영국의 처칠은 1919년 하원에서 '마치 세균을 잠입시키듯, 독일이 레닌을 러시아로 보냈다'고 연설하였고, 레닌에게는 제국주의 전쟁보다는 러시아 혁명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중요한 목표였다는 점도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