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1945년부터 1987년까지 역사를 다룬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저자 이영훈 교수는 '나라만들기' 라고 한다. 이 책은 새로운 이념에 의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에는 시간을 두고서 단계적으로 성취해 가지 않으면 안될 수많은 과제가 있다는 관점을 취한다. 그것이 '나라만들기' 라고 한다.
'나라만들기'에는 합리적인 계획과 건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를 두고 인간들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지난 60년 역사가 온통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볼만한 '나라만들기'의 역사였음은 심한 갈등 속에서도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역사에서 빚어진 온갖 허물과 희생에 눈을 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이 나라가 얼마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허둥지둥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피했으면 좋을 큰 상처를 안게 되었는지를 몇 차례나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은 상처투성이의 나라로 출발하였다.
이 책은 1988년부터 민주화시대를 맞이하여 우리의 '나라만들기' 역사가 일단락 지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어디까지나 일단락이다.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 나라가 차라리 생겨나지 말았으면 좋았다는 역사관이 오히려 그 때부터 널리 확산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겉치레만의 일단락이다. 어느 나라가 자신의 출생 기원과 성장과정에 대해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공감할 역사를 쓸 수 없다면, 아니 쓸 의지가 없다면, 그 나라의 장래에 무슨 볼만한 점이 있겠는가.
동서대학교 마이어스(B.Y.Myers) 교수는 2010년에 발생한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한국의 대학생들이 보인 반응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폭침한 그 군함에는 동서대 학생 한명이 수병으로 근무하다가 전사했다. 그럼에도 그 사건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동 대학의 학생은 거의 없었다. 분노는 커녕 무시할 수 없는 수 없는 많은 학생들이 이명박정부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음모설을 지지했다. 마이어스 교수는 2002년 여중생 두 명이 훈련 중인 미국군의 장갑차에 치여 죽은 사고를 상기시켰다. 당시 온 나라가 두 여중생을 추모하고 미국을 비난하는 촛불로 밤거리를 덮었다. 그처럼 흥분하던 한국인이 천안함 폭침으로 46명이 전사했는데도 전혀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어스 교수는 한국인에게 '국가이성'이 결여되었다고 진단했다.
대한민국에 다수의 국민이 공유하는 국가의 역사가 성f립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을 2008년의 광복절 기념식에서 찾는다. 당시 정부는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1948년 8월 15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해의 광복절은 '건국 60주년'이었다. 대한민국이 환갑을 맞이한 것이다. 그 특별한 의미를 살려서 새 정부는 그 해의 광복절을 '건국 60주년'으로 경축하였다. 그랬더니 야당이 그에 항의하면서 기념식에 불참하였다. 야당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미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이와 같은 깊은 내면의 분열이 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정치와 사회의 크고 작은 갈등과 대립으로 표면화한다. 국민 모두가 애국심으로 공유하는 국가의 역사가 아직 성립하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역사가 없다. 마이어스 교수의 표현 그래도 '국가이성'이 결여되었다. 이런 상태를 그대로 두면 대한민국은 아마도 선진국이 되지 못한다. 선진국은 커녕 외부로부터 예상치 못한 큰 충격이 가해지면 정치와 사회가 크게 분열하여 국가체제가 사상누각처럼 허물어 내릴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자랑스럽게 공유할 역사를 새롭게 쓸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쓰이고 가르쳐진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해 온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가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 분열의 역사가 아니라 통합의 역사를 새롭게 쓸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기성의 사회체제를 때려 부수지 않고 좋은 점은 계승하고 나쁜 점을 버리는 개량적인 방식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예컨대 건국초기 대한민국은 이전의 총독부와 미군정이 제정한 법률을 계승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구축한 시장 경제체제는 그대로 온존되었다. 좋은 것은 비록 그것이 제국주의 만든 것이라도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결국 역사를 발전시켰다.
혹자는 일제의 통치기구와 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폐기하지 않았다고 대한민국을 비판한다. 대한민국을 두고 반민족세력에 의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이해가 그렇게 생겼다. 하지만 기존의 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때려 부술 때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북한의 역사가 잘 말해 준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고향에서 추방하였다. 일제가 만든 법과 모든 통치기구를 폐기하였다. 그랬더니 그 법과 제도에 실린 근대문명마저 죄다 폐기되고 말았다. 그 법과 제도가 보장한 자유 이념이 계급의 적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자유 이념에서 바라 본 역사의 발전은 타협적이며 개량적이며 점진적이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사를 성찰하면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어둡고 부정적이고 정체적으로 비쳐진 대한민국의 역사가 밝게 긍정적으로 달리 해석된다.
나라의 본질은 이념이다. 이념이란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의 인간들을 평화롭고 정의로운 질서로 묶어내는 원리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이념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이다. 그것은 서유럽 근대에서 생겨난 정치철학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국인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으로 나라를 세웠음을 의미한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전통 왕조체제와 신분사회가 해체되고 그것이 남긴 역사적 유산을 밑거름으로 하여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그러한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에서 영근 첫 열매였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의 주도세력은 신탁통치나 좌우합작 같은 형태로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은 한국 민족 전체를 공산화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민족의 통일은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국가를 굳건하게 세운 위에 북한을 지배하는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는 순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이 같은 건국노선과 통일노선은 자유 이념을 토대로 하여 한국인이 몇 세대는 더 걸어가야 할 '문명사의 대전환'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대한민국은 일제가 남긴 법, 행정, 경제의 제도와 기구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비록 일제가 지배의 목적으로 구축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근대문명의 산물이었다. 그것을 그대로 존치한 것은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에서 정당한 선택이었다. 건국 초기의 현실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하였다. 그 일선을 담당한 친일출신 경찰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함에는 무리가 따랐다. 친일파 청산의 미진함 역시 대한민국이 안고 가야 할 깊은 상처를 이루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의 건국, 농지개혁, 625전쟁의 방어, 한미군사동맹의 체결, 자립경제를 위한 기초공업의 육성, 교육혁명과 같은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와 경제는 이 같은 1950년대의 성취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종신집권을 추구한 개인적인 과오에다 한국정치의 구조적 모순(정부통령의 직선제 등)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독재자라는 오명과 함께 쓰려졌다.
419와 516으로 이어진 두 정치적 변혁은 새로운 국제정세 하에서 근대화라는 국가의 지체된 과제를 감당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나라만들기' 역사의 제2단계를 의미한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혁명 세력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추구한 대통령중심제, 반공태세, 한미동맹 등과 같은 국가정체성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1963년 제3 공화국의 출범과 더불어 건국 이래 정부형태를 둘러싸고 벌어진 근본주의적 대립은 해소되었다.
1965년을 전후하여 박정희는 정부, 기업 , 은행, 단체 등을 일산분란하게 통제하고 동원하는 발전국가체제를 구축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미국, 일본과 정치적 동맹과 견제적 협력의 체제가 강화되었다. 그 과정은 동시에 대통령의 카리스마, 정부, 집권당이 일체가 되는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부활이기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주의 발전국가체제는 한국인에 축적된 성장의 잠재력을 극대로 동원함에 성공하였다.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의 수출에서 비교우위를 추구한 개발정책은 1970년대에 들어 중화학공업에서 비교우위를 모색하는 모험적인 투자로 이어졌다. 그것이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 데에는 한국의 기업가들이 발휘한 탁월한 기업가능력이 매우 중요하였다. 박정희가 구축한 권위주의 발전국가체제른 그의 죽음 이후 전두환 정부에 의해 계승되어 1987년까지 존속하였다. 그 사이 한국 경제는 세계 최빈국 대열에서 중진경제로 진입하는 기적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근대화세력과 민주화세력간의 긴장은 박정희의 유신체계를 파열시켰다. 뒤이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또 한번의 정변과 유혈 참극을 통해 박정희의 권위주의 체제를 계승하였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지탱할 명분과 능력을 결여하였다. 민주화세력의 저항은 일층 격렬하였다. 그들의 저항은 시민적 중산층으로 성숙한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직선제를 복구하자는 다수 국민의 요구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987년 10월 여야 합의에 기초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른다. 근대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은 오랜 대립과 경쟁 끝에 '나라만들기'의 제3단계에 해당하는 민주화시대를 함께 열었다. 그 사이 한국경제는 중진대열에 진입하였으며, 그에 따라 개발전략을 두고 제2단계를 관철한 근본주의적 대립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도전을 물리치고 자유 이념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를 세운 역사이며, 정부형태와 개발전략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을 차례로 해소하면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진경제와 민주주의를 성취한 역사이다. 한국인의 '나라만들기' 는 1987년에 이르러 일단락을 보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었다. 국가경제를 선진화하고,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복지국가를 설계해야 했다. 새로운 분열과 갈등의 요소도 잠복해 있었다. 그렇지만 어지간한 내외의 도전에도 잘 넘어지지 않을 국가가 들어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라의 기초로 애국적 국민이, 시민적 중산층이 그런대로 도탑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