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에서 이사 와서 중구 황학동이라는 서울 한 복판에서 보낸지 3년째, 주말마다 운동 삼아 한양도성 길을 걸었다. 하루는 낙산 및 북악산 코스, 하루는 목멱산 코스, 또 다른 어떤 날은 인왕산 코스를 두세시간 정도 짧은 시간을 들여 트래킹하면서 등산길 주변에 펼쳐져 있는 역사의 발자취를 수시로 접하였지만 큰 감흥없이 지나곤 했었다. 그러나 저자의 이번 책을 통하여 서울은 아니 한양은 5백년 이상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도이며 5대 궁궐이나 4대문 등 장엄한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중 출근 길에 또는 주말 등산 중에 무심코 지나친 역사의 흔적들을 이번 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 거기에 담긴 역사를 조금 더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이었던 등산길 주변의 몇가지 흔적들을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세검정의 유래에 대해서는 엇갈린 이야기들이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귀, 김류 등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도모하기로 결의하고 '세검입의' 즉 '칼을 씻으며 정의를 세웠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총융청 감독관이었던 김상채는 '세검정' 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총융청'이 탕춘대로 이건된 뒤 무진년(영조 24년, 1748년)에 새로운 정자를 세운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원래 존재하던 인조반정 시절의 세검정이 큰 물로 떠내려 갔다든지 하는 이유로 무너졌고 영조 때 총융청의 사령부가 이곳에 들어오면서 정자를 다시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이후 세검정은 도성 사람들이 한 때를 즐기는 명소로써 자리매김 하지만 세검정이 조선 왕조 국사에서 중요한 장소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 '조선왕조실록' 편찬 때 세초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승하하면 바로 다음 왕 때에 실록청을 설치하여 전왕 시대의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 편찬은 초초, 중초, 정초 세단계를 거쳐서 완성되었는데 이렇게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보관하고 초초와 중초 그리고 사관이 개인적으로 제출한 사초는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이를 물로 흔적 없이 씻어냈다. 이를 세초라고 했으며 태우지 않고 물로 씻어낸 것은 종이를 재생하기 위한 조치였고 그 세초가 세검정 계곡에서 이루어졌다. 세검정 계곡의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기도 했지만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가 근처에 있어 자원 재활용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서울 한 복판 동묘역 인근은 주말이면 전국 어느 지역보다 인구 밀도가 높은 장소로 변모한다. 노점상 좌판이 크게 벌어지고 귀한 물품은 거의 없고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값싼 물건이 가득한 벼룩시장이 들어서는데 젊은이들과 가끔 눈에 띄는 외국인들이 있지만 주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추억의 유물들은 구경하며 한나절을 즐기고 있다. 동묘역에서 청계천 영도교 쪽으로 인파를 헤쳐가며 내려오다 보면 왼편으로 보이는 전통 건축물이 동묘이다. 동묘는 동관왕묘의 준말이다. 삼국지의 영웅 관우가 사후에 점점 신격화되어 관왕으로 받들어지면서 사당보다 격이 높은 묘가 된 것이다. 본래 조선왕조에는 관왕묘가 없었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조선에 파병온 명나라 장수들이 주둔지에 관왕묘를 세우며 등장했다. 서울엔 1598년 명나라 장수 진인이 남대문 밖에 남관왕묘를 세운 것이 처음이었고 그 뒤를 이어 1601년에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라에서 동대문 밖에 건립한 것이 동관왕묘이다. 그러다 조선왕조 말기가 되어 미신이 횡행하면서 고종이 북관왕묘와 서관왕묘까지 지었지만 일제가 항왜의 유적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이유로 나머지를 폐묘시키면서 현재의 동관왕묘만 남게 되었다.
동관왕묘에서 북쪽으로 가다보면 창신동과 숭인동에 다다른다. 이 두곳의 지명은 조선초 이곳에 있던 숭신방과 인창방에서 한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것인데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자취가 짙게 남아 있다. 정순왕후는 단종 보다 한살 많은 1440년 생으로 연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15세때 단종비가 된 후 3년만인 18세때 단종과 생이별하고 82세까지 한을 품고 살았다. 그녀는 숭인동에 있는 비구니 승방인 정업원에서 평생을 단종을 그리며 세 시녀와 함께 살았다.그녀가 영월로 유배된 단종을 그리워하며 동쪽을 바라보았다는 동망봉과 동망정, 그녀가 빨래를 하던 샘터인 자주동샘이 인근에 있다. 그녀가 가진 한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저절로 들었다고 한다. 동망봉에서 동관왕묘에 이르러 정순왕후를 도와주기 위해 동네 부인들이 열었다는 여인 시장 터를 지나 청걔천으로 나아가면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했다는 영도교에 이른다.
서울은 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와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덕수궁 등 조선왕조 5백년 역사의 산물을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목멱산, 북악산 등 반경 2킬로미터의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고 북쪽의 북한산, 동쪽의 용마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 등 반경 약 8킬로미터의 외사산이 서울의 외곽을 형성하며 넓게 둘러싸고 있다. 그사이 한강이라는 아름답고 도시에 존재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강이 강남과 강북을 가르며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서울을 처음 찾아오는 외국인을 맞이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올림픽대로를 타고 달릴 때 한강 너머 먼산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저 산 밑에 서울 시가지가 있다고 하면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도심 속에 저런 준수한 산이 있고 어떻게 이처럼 장대한 강물이 도시를 가로 지를 수 있느냐며 이구동성으로 믿을 수 없다를 연발한다. 그러나 서울이 진실로 놀라운 점은 그토록 아름다운 산과 강보다도 가장 현대적인 문명의 그늘 아래 600년 고도의 역사의 발자취가 숨쉬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청계천 산책로 주변으로 또 어떤 옛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