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의 여기자는 작가를 만나 취재를 하다가 '서강대학에서는 선생님의 영어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고 하더군요' 라고 했다. '무슨 전설이냐'고 물었더니 여기자가 이런 일화를 전해 주었다. ' 어느 날 원서로 소설을 읽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답니다. '아니, 아직도 내가 모르는 영어 단어가 세상에 있다니! 라면서요.' 진실을 이야기 하자면, 그는 70대 후반인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많은 영어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한다. 글쓰기와 번역을 통해 문학적인 성향의 어휘들은 퍽 익숙하지만, 예를 들어 그는 영어권 아이들이 세 살 이전에 다 배우는 아주 쉬운 실용 단어 '똥(poop)'을 환갑이 훨씬 넘어 인터넷(위키피디아)에서 'dog poop girl(개똥녀)'에 관한 글을 읽고서야 깨쳤다, 그때까지 그가 알았던 서양 똥의 종류는 feces(배설물)나 excrement(대변), 그리고 defecation(배설) 따위의 고상하고 수준 높은 단어들에, 가장 속된 말로는 욕설에 자주 등장하는 shit 정도가 고작이었다. poop은 비록 일상생활에서는 사용 빈도수가 대단히 높은 반면이 이른바 정통문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단어였기 때문이다. " (세월의 설거지, 112페이지)
나는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안정효 선생을 존경한다. 선생이 쓴 소설, 영어공부, 글쓰기와 번역에 관한 책들을 제법 읽었고, 그 분의 실제 삶은 어떠했을까 궁금하던 차에 2017년 발표된 '세월의 설거지"라는 선생의 3인칭 자서전을 알고 이번에 읽었다. 선생의 여러 책들에서 선생의 삶의 단편들을 상당히 알았지만 이 책을 통해 선생의 삶 전반을 안 셈이다. 나(89년 경제학과 입학)는 선생(61년 영문학과 입학)의 대학 후배이다. 선생의 소설이 드디어 베스트셀러가 된 시기에 나는 대학을 다녔고 영문과 동기로부터 선생의 대학시절 영어실력과 영어공부 방법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 머리에 책의 일부분을 장황하게 적어 놓은 것도 그 '유명함'을 책에서 새삼스럽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1941년 서울 공덕동에서 태어난 '소년'은 195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며 공부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많았다. 고교시절 전국 무전여행을 넘어 세계여행을 꿈꾸었고, 수많은 영화를 보다가 정학을 당했고, 수업시간에 몰래 만화를 그려 3편의 장편만화를 그렸다. 특히 영화에 대한 사랑은 대단해서 '우리나라에 수입된 서양영화를 한편이라도 못 보면 그가 놓친 영화에 어떤 나라의 어떤 신기한 사람들이 나와 어떤 황홀한 이야기를 엮었을까 궁금하여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는 영화를 보기 위해 마포에서 안국동 학교까지 걸어다니기로 결단했다. 등하교 길을 전차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 영화 한편을 볼 자금이 마련되었다. 가난했고, 삶이 고되었으며 특히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그에게 영화와 만화는 탈출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상상력을 키우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을 훈련시켜 앞으로 장편소설을 쓰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만화를 통해 다져진 그림 실력으로 서울대 미대 진학을 꿈꾸던 '청년'은 친구의 권유로 당시 새로 문을 연 서강대학 영문과에 진학한다. 그는 고교시절 소홀했던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문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본격적인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까지 고생하여 겨우 대학에 들어 왔으니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놀아야 겠다는 다른 학생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 갔다. 학교 도서실에 비치된 우리말과 영어로 된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그는 만화와 영화에 대한 열병이 수그러들고 글을 써야겠다는 욕망이 타 올랐다. 처음부터 그는 장편소설에 도전했는데, 푼푼이 모은 돈으로 산 200자 원고지 300매가 며칠되지 않아 바닥났다. 그에게 글을 쓰는 것은 즐거움이었고, 그 즐거움을 천천히 즐기고자, 그리고 영어공부까지 겸하고자 영어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1학년 첫 방학이 시작되자 그는 한 학기동안 사용한 공책들의 뒷부분의 남은 부분을 뜯어 모아 묶고, 날이면 날마다 텅빈 도서실 늘 같은 자리에서 영어로 소설을 썼다. 대학을 졸업하기전 7권의 영어 장편소설을 썼고(그 중 하나가 '은마' 이다) 미국의 출판사에 열심히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어찌됐든 그의 영어 실력 만큼은 일취월장했고, 영어로 소설을 쓰던 그를 교수들은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교육을 시켰다. 이후 일생에서 그는 '일감을 구하러 집밖을 나선 적이 없고, 오히려 갖가지 직장이 늘 그를 쫓아다녔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청년은 모 영자신문에서 취업권유를 받았고, 수습딱지가 아직 떨어지기 전부터 그는 그의 이름이 붙은 큼직한 기사를 쓰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1966년 베트남에 파병을 가, 보도병으로 외국 종군기자들을 전투지로 안내하고 통역하는 한편, 전투 군인들과 실제 작전지역을 함께 다니며 전쟁터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영어기사로 작성하여 국내외 언론에 기고하였다. 이 때의 경험이 그가 나중에 쓸 소설 '하얀 전쟁'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청년은 신문사, 잡지사를 거쳐 1971년 브리태니커 한국 회사의 편집개발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신문사보다 다섯 배가 높은 봉급을 받았다. '문학사상' 주간 이어령 교수가 '대학시절 7권의 영어소설을 쓴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영문 소설의 번역을 맏겼는데, 청년은 100매가 넘는 분량을 이틀만에 끝내서 '대단한 속도'를 단숨에 인정받았다. 빠르고 정확한 번역 솜씨가 알려져 문학작품 번역 요청이 쇄도했고, 매달 새로운 번역물을 하나씩 내놓던 그에게 '월간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학시절 쓴 영어소설이 모두 거절당하며 소설가로 성공하겠다는 의욕은 꺾였으나 부분적으로나마 창작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문학 번역의 길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2017년까지 127권의 작품을 번역하였고, 76세인 2017년에도 '민음사'에서 헤밍웨이의 회고록 번역 청탁을 받아 번역 소득을 올렸다.
1984년 '번역문학가'는 월간지의 장편소설 공모를 보고 대학시절의 꿈이 다시 살아났다. 베트남 전쟁 참전 경험을 살려 전쟁에 의해 무너진 개인의 삶을 소설로 써서 응모했다.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심사평을 받았음을 안 그는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아 소설을 '실천문학'에서 '전쟁과 도시'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렇다 할 성공은 없었다.
1987년 1월 '작가'는 평생 처음으로 미국에 갔다. 번역 등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여동생이 사는 텍사스 시골에서 '전쟁과 도시'를 영어로 다시 써 대학시절꿈인 미국 문학계 진출이라는 꿈을 이루어 보려는 요량이었다. 미국에 있는 그의 친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에 온 이유를 묻자 그는 솔직히 말했고, 그 친구는 '너 아직도 그 짓 해? 지치지도 않아?' 라고 했다. 그는 아직 주저 앉을 생각이 없었다.
미국 출판계 진출은 우리나라처럼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이 아니라 출판 대리인을 통해 출판사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대리인을 통하지 않은 원고는 개봉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다는 대리인을 고용했고, 그에게 영어로 개작한 소설을 대리인에게 보냈다. 소설 초안을 본 대리인은 그에게 전화로 '이런 수준의 작품을 팔기 어렵지 않다.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를 버써 찾아냈다' 라고 했다.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무엇에 홀린 듯 했다. 대학시절부터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1989년 미국 주요 신문사에 서평이 걸리며 그의 소설 'White Badge'가 출판되었다. 1990년 한국에서도 '하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동년 미국에서 "Silver Stallion', 한국에서 '은마는 오지 않는다(이후 '은마'로 재출간)'가 출판되었다.
노년이 된 작가는 아직도 생산적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늘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더이상 그는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최고의 걸작을 쓰겠다는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소설, 번역물, 영어 관련 등 180권에 그의 이름을 달아 출판했고, '닫히는 문 앞에 멈춰선 작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더 이상 올라야 할 의무도 끝났음을 인정하는 순간에 삶에서 가장 큰 마지막 도약이 이루어진다고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