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시기중 일본편은 일본에 자주 여행가는 나로서는 가이드 북으로 삼아 열심히 읽고 습독한 도서이다. 그런데 일본을 여행하며 사찰에 들릴때마다 느끼는 것중 하나가 그들의 인공미 가득한 정원이다.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고 이쁘기도 하지만 블럭 쌓기 장난감과 같은 공간재현, 거기에다 정원을 통제하니 가까이 갈수 없다는 답답함과 함께 그 정원이 어떤 철학적 의미가 있는지 답답할 뿐이어서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의 마지막인 일본의 정원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한국정원과 일본 정원 차이는 무엇인가? 일본정원은 자연을 재현한 인공적 공간으로 인간이 들어 갈수 없으며 철저히 가위질로 인공의 미를 추구하는 대신에 한국정원은 자연적 공간에 인공적 건물이 배치되고 나무와 화단이 조성되어 사람이 그속에 파묻히게 조성되었으며 자연을 살리고 무성한 곳을 다듬거나 빈공간을 조경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본은 정원(庭園)이고 한국은 원림(園林)이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미는 알겠지만 아직 철학적 소양이 없어서 그런지 일본의 꾸며논 정원에 대한 이해가 난해하다. 책에서 보면 저자 유홍준 교수는 한국의 정원인 창덕궁 부용정, 보길도 부용정, 담양 소쇄원, 성북동 성낙원, 강릉 열화원, 영양 서식지, 사찰로는 순천 선암사. 서산 개심사. 안동 봉정사 영선암 등을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으로 알려주며 관람을 권하고 있다. 일단 일본의 정원의 이해보다 코로나시국에 국내 정원을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책에서 언급한 가쓰라 이궁, 1615년 도시히토 친왕이 창건 (원래 이름은 하치조 궁가)한 고보리 엔슈 작품, 도시히토 친왕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아들 도시타다가 거부 다이묘 마에다의 딸과 결혼하며 처가의 지원을 받아 1645년 완공한 별궁이란다. 도시히토 친왕은 천왕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들이 없자 후계자로 입양되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아들 쓰루마쓰가 태어나자 복귀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지 하사로 독립된 왕가인 하치조 궁가를 구성하였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천왕으로 천거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상속자 경력을 이유로 거부하여 가쓰라 이궁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 가쓰라 이궁의 정원을 유홍준 교수는일본 지천회유식 정원의 백미로 극찬을 하고 있는데 실물의 궁금증을 답사로 풀고 싶다. 가쓰라 이궁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블락디보스톡을 거쳐 53세에 일본 체류하며 일본 건축에 심취했던 1차대전전 철강과 유리소재로 라이프치히 박람회의 철강관, 유리파빌리온을 건축하며 유명세를 탓던 독일 건축가 부르노 타우트에 의해 명작의 3가지 조건을 충족했다고 평가받으며 관심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궁금증이 증폭될수 밖에 없다.
이 문화 답사기에는 일본의 정원을 답사하며 문화재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평가를 하는 가운데 예술에 있어 일본이 장식화가 위주이지만 조선시대는 장식화보다 감상화가 주류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에서는 기술을 천기하여 장인들을 “쟁이”로 취급함으로써 장인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반면 서화만은 사대부가 직접 참여하거나 화원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으나 일본은 감상화 등 실용을 강조하여 현대에서도 에니메이션, 도자기 목칠공예 등은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지만 국력에 비해 예술에는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가마쿠라 말기 1315년 대동국사가 대덕이라는 작은 절을 지은 것에서 시작, 10년뒤 천왕이 기도처를 삼음으로 1326년 대법당을 짓고 대덕사라 불렀다는 대덕사, 1334년 고다이고 천왕이 겐무의 신정을 펴며 교토 5산10찰보다 더 상위에 놓았으나 2년뒤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며 5산10찰의 최하위로 격하되고 이후 5산10찰에서 이탈하여 독자 노선을 걸었던 대덕사의 탑두의 정원들도 아름답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를 이곳에서 성대히 거행하며 대규모 기부가 이루어져 대형 사찰로 발전한 대덕사는 대덕사안에 탑두사원을 갖는 것을 당시 최대 영광으로 여겨 많은 탑두 보유하고 있으나 지금은 현존하는 22개 탑두중 용원원, 서봉원, 대선원, 고동원 4곳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대덕사중 삼문은 역사적 사건이 있다. 다도의 대가 센노 리큐가 1589년 증축 완공한 것으로 이곳에 관례대로 자신의 입상을 안치한 것이 빌미가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할복을 명받고 자결한 사건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노리큐를 죽인 것은 딸을 자신에게 주지 않다는 이유와 임진왜란을 반대했다는 이유 등 이었다고 한다. 대덕사내 탑두로 <고동원>은 다이묘이자 리큐7인중 한사람인 호소카와 다다오카가 아버지 명복을 빌기위해 세운 사찰이며 센노 리큐의 저택으로 서원을 삼고 리큐 소장 석등을 자신의 묘비로 대신하였고 다실 송향헌은 히데요시가 1587년 개최한 대다회의 다실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고봉암>은 미개방 탑두로 고보리 엔슈의 유해 보관하고 국보급 다도이완이 있어 유명하다고 한다.
에도시대 들어서며 교토는 사찰보다는 왕들의 별궁등이 발달하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에도로 이전하자 정치는 에도, 상업은 오사카, 교토는 문화의 중심지 역할하며 문화중심지로서 교토의 위상 하락 및 막부의 에도 설치로 지방 문화가 발달하였다. 오닌의 난으로 교토가 불바다가 되며 명문, 명사들의 타지역 이주하며 다이묘들의 전성시대가 되며 다이묘정원 설치 등 지방문화 발달하여 다이묘의 정원에는 즐긴다는 의미의 樂자를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일본의 3대정원은 가나자와 겐로쿠엔, 오카야마 고라쿠엔, 이바라키 가이라쿠엔으로 코로나에서 벗어나 일본여행이 가능해지면 반드시 유홍준 교수 말대로 답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