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활동을 통해 감정이나 세계를 표현하고 감정적 스트레스를 완화하며 말로써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나 생각을 미술로서 표현하는 것이 미술심리학이다. 즉. 미술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 발산하고자 하는 행위인데 우리는 많은 미술작가를 통해 화가의 마음과 관객의 마음을 교감하고 느끼고 있다. 미술의 마음, 이 도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화가중 카라바조, 렘브란트, 에드워드 호퍼, 제임스 터넬 등 다양한 작가의 인생과 미술작품을 통한 인간의 심리적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두번의 살인을 저지르고 죄책감과 불안한 심리상태를 어둠과 빛의 대립으로 폭력적 순교와 단죄보다 화가의 실제 삶을 잘 표현하여 바로크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 것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단죄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라는 작품에 자신의 머리를 골리앗 머리로 묘사한 장면, 대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색채는 개인적 기억이나 특별한 경험과 연합되었을 때는 특별한 감정을 유발한다고 한다. 이런 색채를 터너는 사실주의적 또는 고전주의적 그림이 성행하고 있던 당시에 형체가 해체되고 색체의 역동만 가득한 그림으로 급진성을 보여주었다. 경계가 흐려진 묘사와 강렬한 색채로 내면의 풍경을 담은 터너의 풍경화는 낭만주의 화풍의 대명사가 되었다. 터너의 낭만주의는 단지 자연의 숭고함과 거대한 힘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인간의 휴머니티와 공학의 창의성을 묘사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의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함께 그렸다. 20세기 중반 현대 추상미술의 주요한 흐름은 색채가 관객의 영혼에 울림을 주는 강력한 매체라는 견지를 고수해 왔다. 색채가 심리현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다수의 사례보고가 나오면서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는 색체에 대한 개인의 감정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문화 즉흥적이어서 보편성을 찾기 어렵다. 색채는 문화적 맥락에서 정보전달 기능도 있다. 신호등, 구급차, 이발소 표시 등은 흰색과 붉은색의 조합으로 주의를 긴장시킨다는 공통정이 있다. 색체의 정보특성은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서구에서는 흰색은 순수와 결백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는 애도의 의미를, 검은 색은 서구에서는 죽음과 관련되지만 고대이집트에서는 삶과 환생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북유럽 덴마크의 화가 마크 로스코는 전시조건으로 18인치 떨어진 거리의 어두운 조명과 그림앞에 벤치를 두는 조건을 내걸어 관객들이 그림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할수 있도록 함으로써 간츠펠트효과(특정의 강도의 색과 빛에 장시간 노출되면 공간감을 상실하고 공중에 떠있는 듯한 이상 감각을 경험하는 현상, 극지방에서 눈보라속에 공간감각을 상실하는 화이트 아웃)을 유도하여 감정을 관객과 교류하고자 하였다. 세계 2차대전 이후 구상은 파괴되고 조형의 기본요소들로 환원되며 회화는 촉감, 속도, 색채, 빛의 감각이 개별적으로 내포한 미적 요소들을 추구하였고 무엇보다 감상자와의 감정적 교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미국의 미술비평가 헤럴드 로젠버그는 추상미술을 액션페인팅과 색면회화의 두 흐름으로 정의 하였는데 이시기에 모래위에 페인트를 흩뿌려 거대한 그림을 그리던 잭슨 폴록과 붓질의 운동감을 살려 화면에 속도와 촉감이라는 감각적 요소를 불어 넣었던 빌럼 데 쿠닝과 같은 화가들이 액션페이칭을 시도하였다. 반면 미크 로스코, 바넷 뉴면, 클리포드 스틸과 같은 화가들은 거대한 캔버스에 색채와 빛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강렬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유도하는데 집중하였다. 현재의 미술은 한 세기전 잭슨 폴락이 물감을 흩뿌리기 시작하면서 2차원의 공간을 탈출한 시각예술은 이제 제임스 터넬에 의해 우주의 빛을 체험하는 4차원의 시공간 예술로 진화하는 중이다. 다양한 색채를 입은 빛으로 공간을 재창조하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게 해 새로운 경험을 유도한다. 때로는 안정을 유도하는 자연조명과 인공조명은 현실과 초현실적인 것 사이의 감각을 불러 일으키며 관객을 매료시킨다. 제임스 터렐은 예술가가 정원사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정원사가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정원에 앉아 사람들은 자연과 세상에 대해 명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정원사는 사제보다 더 종교적인 존재 일수 있다는 것이다. 빛의 정원을 가꾸는 예술정원사, 제임스 터렐. 그는 우리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변해가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자산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