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사, 세계사 등 역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남편의 추천으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신청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내가 세계사에 관심이 있을리 만무함에도 대부분은 한번쯤은 들어보아 모두 익히 귀에 익은 사건들과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표지 또한 산뜻하여 첫인상에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은 아주 완벽하게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살이 하나도 없어 가치가 없는 핵심적인 것이거나 겉 껍질만 핥아서 열매의 맛을 모르듯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유시민 작가님의 글을 통해 다시 접하게 된 사건들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우연히 발생한 듯 보이지만 인간의 무지, 무관심, 잔인함 등이 만들어낸 필연의 산물들 같았다. 세계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20세기 세계사의 열한 가지의 큰 사건들이 하나같이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목적을 위해 또는 나의 안위를 위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있었음에 인간의 나약함이 무기력하게 다가왔다. 또한 피하고 싶었던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에 '나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라는 빠른 고백에 결핍과 공포 앞에 놓인 군중에게 인간성이란 사치인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투쟁, 혁명, 전쟁 등 나와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것으로만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던 중 읽게 된 부분이 드레퓌스 사건이다. 맨 처음에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낯설은 내용이기도 하고, 정치암투 정도로 생각하고 다른 부분부터 보고 나중에 읽게 된 부분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말에 드레퓌스라는 프랑스 참모본부의 포병대위의 간첩혐의사건이 정치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사회를 크게 분열시켰던 사건이다. 드레퓌스는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어의 없게도 재판의 증거는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그런 일을 할 만한 동기가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판단에 깊게 작용하였고, 군사법원은 신속하게 비공개재판을 진행해 드레퓌스의 국적을 박탈하고 종신형을 선고했다. 심지어 진범이 다른 사람이라는 내부적 확증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진상발표를 거부하고 은폐하려했으며, 이런 진상을 알게 된 드레퓌스의 가족이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하지만 정치문제로 비화되는 상황에 다급해진 군부는 자기네 위신을 지키는 일이 국가 안보를 지키는 일이라 확신하며 형식적인 심문과 재판을 거쳐 진범인 그를 무죄 석방한다. 하지만 무죄선고가 나오고 이틀이 지난 1898년 1월 13일. 소설가인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인 '나는 고발한다'는 큰 반향을 일으킨다. 서한에서 에밀졸라는 에스테라지를 진범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밝히고, 드레퓌스 사건을 만든 장본인인 참모본부의 장군들과 필적감정가, 국방부와 군사재판을 호되게 꾸짖는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깨어있는 지성이 사건의 방향을 멱살잡고 바꿔놓았지만 무죄판결이 아니 잔여형량 면제와 군적박탈 취소인 특별사면하고 루소총리는 정치적 영민함을 발휘해 지루하게 이어지는 사건이 해결되길 바라는 군중의 피로감을 이용해 결백한 드레퓌스와 그를 반역자로 조작한 범죄자들을 똑같이 사면한다.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 있는 전개에 이게 정말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헛웃음이 나기도 하고 지금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없어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레퓌스와 그의 가족의 진실함은 어쩜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현실을 견딜 힘을 주고, 그렇게 견디어 나가는 과정에서 피카르 중령, 에밀 졸라와 같은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사회는 미성숙하고 우리는 매일 잘못된 판단을 함에도 불구하고 삶은 의미가 있고 인간의 본질은 그 무엇보다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삶이 무너져갈 것을 예감하면서도 진실에 다가갔던 피카르 중령을 보면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나도 어쩔 수 없었겠지' 하는 무기력에서 '나도 그렇게 직진할 수 있을까' 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게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