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에는 커다란 두 물줄기가 있다. 하나는 산업화세력이다. 5·16을 옹호하며 산업화의 주역임을 자처하는 그들은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상층부를 장악하고 결속해 있는 보수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화세력이다. 4·19를 옹호하고 5·16을 비판하며 민주화를 이룬 주역임을 자부한다. 그들은 민주세력, 진보세력임을 자처한다.
한국현대사는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며, 때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민이 두 세력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하는 셈이라 온전한 역사인식이라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유시민은 역사 인식에 어느 한쪽으로 지우치지 않을려는 애썼다.
한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대중의 욕망(慾望, desire)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안고 산다. 욕망은 행동을 일으키고 행동은 사회를 바꾼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1959년은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겨우 6년밖에 안됐다. 절대빈곤과 전쟁의 참화에 숨이 넘어가던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군사·경제적 지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출생과 성장을 도운 양아버지였다.
1인당 GDP가 81달러로 방글라데시·우간다·토고 등과 함께 세계 최빈국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그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고 헌법에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았으며 국민을 가난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은 1960년 4·19로 터져 나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5·16으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부는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을 부추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개발독재를 구축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풍요롭고 화려하며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가 되었다. 1959년 세계 최빈국에서 2020년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대국으로 올라섰다.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세기 신생국가 중에 대한민국처럼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거대한 현대적 산업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성공한 나라는 없다.
안보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국가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복지로 무게중심을 옮겨졌다. 또한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탐구한다. 생각과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하는 시대이다.
완전한 조작선거였던 1960년 3·15부정선거에 대항하여 4·19의 불길은 고등학생들이 피워 올렸다. 다음으로는 대학생이 급기야 대학교수들까지 거리로 나왔다. 주한 미국대사와 외무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까지 하야를 요청하게 되자 4월 26일 사임 발표를 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그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인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됐다.
1961년 5·16은 박정희 소장이 3,500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 시설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테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의 핵심 혁명공약은 두 가지였다. 첫째,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한다. 둘째,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전자는 이루었으나 병영 복귀는 실천하지 않았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1·5% 간발의 득표율 차이로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7년에는 제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이 걸었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답습하였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출마하여 1971년에 제7대 대통령이 됐다. 1972년에는 유신헌법이 공포되었으며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하였고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추종자들로만 체육관에 모아 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8년 집권 기간에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바꿨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시설을 보급하고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가꿨으며 전국에 상하수도와 저기를 보급하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그는 크게 성공한 독재자였다.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은 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 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우리 국민이 지금처럼 풍요롭게 살았던 적은 없다. 반세기 동안 숨 가쁜 속도전을 펼친 끝에 5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산업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사실에 대해 모두가 똑같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민생을 파탄에 빠뜨리고 국민경제의 성장 엔진을 꺼버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한국경제를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뤘다면 골고루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살벌한 경쟁풍토, 재벌 대기업의 탐욕과 횡포, 심각한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의 확산, 세계 최장시간 노동과 높은 자살률, 참혹한 환경파괴 등 한국사회의 부정적 현상이 모두 박정희 시대에 비롯했다고 비판한다.
어쨌든 한국경제는 기적에 가까운 성장을 해왔다. 2019년 수출입 실적을 국가별로 살펴보자 우리나라 최대 수출국은 중국 (25.1%), 미국(13.5%) 베트남 (8.9%) 순이고 최대 수입국은 중국 (21.3%) 미국 (12.3%) 일본 (9.5%)이었다. 최대 무역흑자는 홍콩 (301$)이며 최대 무역적자를 낸 나라는 일본 (192$)이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무역 수출입은 미국보다 중국에 더 의존해 있으며 일본은 한국에게 아직도 여러모로 덕만 보고 있다.
한국경제는 선진 산업국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해 빠른 속도로 추격했으며 몇몇 분야에서는 선도자가 되었다. 반도체, 컴퓨터, 이동통신, 바이오, 인공지능 등 고부가가치 미래형 산업 분야의 혁신경쟁에서 지속적으로 성과를 낸다면 머지않아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넘어서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나라는 박정희 시대에 소규모 개방경제로 가는 길을 선택해 성공을 거두었다. 노태우 정부가 옛 사회주의 국가들과 서둘러 수교한 데 이어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내걸고 그 흐름을 더 분명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첫 FTA인 한칠레FTA를 체결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층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FTA를 타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FTA는 농산물과 보건 교육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 모든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는 협정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 한 외신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그러나 세계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보란 듯이 자유를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세워냈다.
평화적 권력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그에 맞는 시민의식과 행동양식을 발전시켰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질서정연하게 새 대통령을 뽑았다.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자유에 대한 욕망과 꿈, 정의를 향한 열정과 헌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분투와 희생으로 엮은 여정이었다.
산업화를 이룬 동력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었다면, 민주주의를 세운 힘은 부당한 외적 강제와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누리려는 욕망이다.
선진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저 얻지 않았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처절한 폭동, 반란, 혁명과 반혁명을 겪은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반세기 동안 둘 모두를 성취해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가 됐다. 우리는 난민촌에서 출발했지만 산업화 시대의 병영을 지나 시민 각자의 개성과 다양한 문화가 꽃피는 민주주의 광장으로 옮겨왔다.
광장에는 담장이 없다. 누구든 들어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다른 일들과 소통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병영에서 광장으로 진화하자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시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애인, 성소수자 그리고 여성이다.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으로 사회혁명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이 대표하는 과학혁명의 시대가 열렸다. 지구촌의 경제와 정치는 자본주의와 대중민주주의로 수렴했고 노동운동도 체제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이제 사회혁명의 성격을 지닌 것은 환경운동과 페미니즘 운동밖에 없지 않나 싶다.
오늘날 우리는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망설임 없이 표현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시장과 도지사, 지방의회 의원을 우리 손으로 선출한다. 정부가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온오프라인 어디서든 거리낌 없이 비판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자격이 있다. 우리의 뜻과 우리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고 시련을 이겨내며 자유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과 국가보안법이라는 냉전시대의 유산이다.
남북한 당국이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네 번의 기회를 만들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첫 번째 기회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 두 번째 기회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이었다. 노태우는 남북관계의 틀을 바꾸었다. 세 번째 기회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남긴 1998년 6·15공동선언이었다. 네 번째 기회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남측 지역으로 걸어 내려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긴 2018년 판문점선언이었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임기 후반 1년 반 동안 바이든 행정부와 공조 협력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핵미사일 폐기와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남북의 군사적 대결 종식과 경제협력 재개, 인도적 지원과 민간교류 등의 과제를 풀어야 한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체제안전보장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말로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내심 적화통일을 꿈꿨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북한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원하며 미국과 수교해 국제사회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한국현대사를 정리하면서 앞으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초고령사회에 따른 산업, 주택, 금융, 노동시장,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을 포함한 사회보험, 경제구조와 사회제도를 모두 조정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에너지 위기다. 석유와 석탄 등 화석연료의 고갈이 예상된다. 대안으로 등장했던 핵발전은 일단 점화하고 나면 끌 방법이 없는 불을 만드는 것이어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두 위기요인을 안고 가면서 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는 해법도 찾아야 한다.
고령화·에너지 위기·양극화를 극복하는 길은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과제다. 각자의 욕망, 신념, 이기심 대신 타인에 대한 연민, 공감을 바탕으로 상호 이해와 협력을 이뤄야 할 수 있다. 시민들이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관리하면서 우선순위를 조정하지 않으면 어떤 지도자도 그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