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유럽 문명을 이끌어 온 다양한 국가의 흥망성쇠 속에 등장하였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유럽문명의 태동이라 할 수있는 그리스의 아테네. 모든 길이 통하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 서로마의 쇠락으로 새로운 유럽의 중심지로 등장하면서 동양과 서양문명의 융합형태를 보여주는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중세의 암흑기를 극복하고 르네상스 이후 근대 시민국가가 등장하면서 유업의 중심지로 부각된 파리, 저자는 자신의 유럽도시기행의 첫번째 칸을 이런 순서로 채워가고 있다.
역사의 흐름과 연계된 도시기행,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해당 도시들과 연관된 유럽 역사의 발전과정을 소개할 수 있고 당시의 문화와 생활상을 개관함으로써 또 지금의 모습과 비교함으로써 독자들이 유럽문명의 진화과정을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첫번째 여행지인 아테네, 철학과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 고대도시, 비록 그들의 민주주의가 시민계급 남성만의 전유물이었을지 몰라도 다수결의 의사결정체계를 인류 최초로 정립하였다는 사실은 불변이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가 몰락후 1,500년 망각의 세월을 건너 근대 국민국가 그리스도 수도로 부활한 아테네는 비록 기운 떨어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 모든 풍파를 겪은 끝에 주름진 얼굴의 철학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오래된 양복에 가려진 기품을 알아볼 책임을 온전히 여행자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두번째 여행지 로마, 서구 문명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빅뱅'을 일으켰고 로마제국에서 '가속팽창'을 했다. 로마는 서구문명의 가속팽창의 흔적을 지닌 도시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문명이 발전양상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우선 로마에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천년 제국의 흔적으로 예술적, 기술적 수준이 높고 규모가 큰 고대 유적이 다른 유럽 어떤 도시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많다. 둘째 바티칸 교황청 덕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품고 있다. 셋째, 19세기 후반 출현한 이탈리아 국가 수립의 역사를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한다.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이스탄불은 회색빛 도시 분위기에 문화적 다양성이 가려진 도시였다. 역사가 무려 2,700년이나 되는 이스탄불의 최초의 이름은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이 바뀐 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다음 500년은 오스만제국의 이스탄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의 중심지가 되고 이후 그리스 정교에 의한 지배하의 비잔틴제국의 중심지로 명멸하였다가 오스만제국의 수도로서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던 도시, 지금은 터키 공화국의 최대도시로서 인구 기준으로는 유럽 최대의 도시, 음울한 회색빛 분위기 아래 과거 찬란했던 로마, 이슬람, 르네상스 문화가 어두운 현실에 의해 가리워진 도시가 되었다.
아야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로 대별되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는, 정치와 종교 권력이 일치된 사회에서 보여지던 문화적 특성들이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 공화국 설립 과정 하에서의 '세속국가론', '공화주의', '터키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사라진 도시, 다종교, 다민족, 다문화를 포용했던 그래서 과거 어느 유럽 지식인이 100년 뒤의 세계 수도 후보로까지 칭하였던 이스탄불은 이제는 단색을 지닌 유럽 변방의 도시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파리는 젊은 도시이다. 파리는 14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보잘것 없는 변방의 도시였으며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가 짧아 고대의 건축물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파리에는 시민들과 분리되어 박제된 건축물이 없었다. 시민들의 일상과 가장 멀리 떨어진 베르샤유 궁전조차 궁전 건물 모퉁이에 있는 레스토랑과 운하 건너 숲에는 현재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리는 태양왕 루이 14세[로 대변되는 근대 전제국가 탄생과 그의 몰락 과정, 대혁명이후 근대 민주주의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성장해온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있다.
베르사유 궁전과 노트르담 성당, 개선문과 상제리제 거리, 르불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수많은 건축물과 문화유산 중에 파리를 대변하는 것은 에펠탑이다.왕과 신의 권세와 영광을 상징하기 위해 지어진 베르사유 궁전과 노트르담 성당과는 달리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넘해 개최한 세계박람회의 관문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높이 324미터의 이 철골 구조물은 과학혁명의 산물이고 공화정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으며 그 제작 과정이 민주적이라는 차원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도시 파리의 상징물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는 유럽도시기행 첫번째 칸을 시간여행으로 정한 듯하다. 유럽역사의 발전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도시들을 간접적으로 방문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늘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퇴행을 반복한다. 그렇지만 인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재미있었고 다음 권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