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 글로벌 정보사회, 냉전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목이기도 한 “과열”이라는 단어는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세계가 수많은 인류들과 개발계획, 그리고 그 활동의 물질적 결과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저자의 언어이다. 이는 지난 세대의 인류학 분야 거목이었던 레비스트로스의 “과잉”이라는 단어에서 차용한 것이다.
인류학적으로 세계의 다양성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열대나 미개척지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 이런 지역을 발견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은 이미 세계적으로 편리해진 통신망과 교통망을 활용할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이 접하게 되는 열대의 미개척지 인류들은 이들을 만나는 순간 어느새 문명인의 범주에 포함되어 버리는 역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문화적 다양성을 연구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있으며, 이제는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된 도덕률을 적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인식되는 세계가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이런 인류학적인 다양성의 상실이라는 부분이 쉽게 이해되긴 했지만, 제목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과잉이라는 것과 직접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그 연결고리를 쉽게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과잉, 과열의 결과로 세계화라는 보편성이 확대되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정도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서두에서도 인류학적인 다양성의 소실을 이야기 한 후 경제성장의 가속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경제성장의 원인이 국제무역에 있다고 결론내린 후, 이러한 국제무역의 과잉이 결국 문화적 다양성을 실종시켰다는 방향으로 추론되었다.
또한, 과잉, 과열의 세계화를 설명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와 스케일(스케일업, 스케일충돌)을 얘기하고 있으며, 과열된 세계에 대한 염려를 담아 석탄에너지 등을 통해 지속가능성에 대해 나아간다.
그리고 중요하게도, 국제무역의 발전, 에너지원의 다변화(석탄, 태양광 등)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보편화에도 불구하고 사우스월드와 노스월드에서 느낄 수 있는 경제규모의 불균형, 에너지소비의 불균형을 극복할 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얘기하면서 결국 과열의 끝이 어디일지를 조심스럽게 걱정해본다. 이동성의 증대로 다양한 여행지로의 체험이 가능해졌지만, 여행을 즐길수 있고, 또 여행지로 삼을 수 있는 지역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점. 결국 인류의 전세계적인 경제발전과 여러 가지 과열현상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이러한 차이에 대한 뚜렷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쓰레기도, 정보량에 있어서도 이러한 차이는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모더니티를 통해 인류는 세계화를 이룰 수 있었지만, 완전한 문화적 동질성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다양성을 발전시켜 나간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전세계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오히려 이 책에서 얘기하는 과열현상을 통해 글로벌 대화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조금씩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으로 전인류보편적인 도덕률을 정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