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쓰는 에세이와 소설을 좋아한다.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잡아다가 흰 것에 검은 글자를 그리던 이들이 겪은 것과 본 것들에 대해 서술하는 과정은 분명 소설가, 수필 전문가들과는 다른 결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황정은, 박연준, 문보영의 에세이를 좋아했는데 그 중 박연준 시인의 첫 장편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에 독서통신연수에서 이 책을 고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름과 루비. 한여름 쨍쨍한 배경일 것처럼 보이지만 이 제목은 ‘여름’의 유년시절 속 인조보석처럼 반짝거리지만 그만큼 거짓된 불순물도 있었던 ‘루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누구에게나 시절은 있다. 어린 시절. 집중하지 않으면 휙 지나가버리고 사랑받았거나 그러지 못한 것으로 표정과 구김살이 달라지는 시기. 우리는 구태여 입으로 말하지 않고 눈으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미숙함에 알지 못했고 보지 못한 것들, 그러기에 안아주지 못한 유년의 시절. 책은 어른들로 인해 강제적으로 ‘없던 시절’을 갖기도 하고 언제나 모자란 존재가 되기도 한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그린다. 고모에게 길러지며 배운 예절과 예절을 갖춰서 사랑을 얻어내고 싶었던 등가교환의 법칙을 이르게 배운 아이, 여름. 거짓도 천진하게 믿어가며 언제나 당당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대로 살아가는 루비. 아이들의 거울은 어른이었을 뿐이다. 이 아이들을 핍박하는 것처럼 나오는 남자아이들도 결국 그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 뿐이다. 쌉싸름한 유년의 기억들이 있다. 부끄럽고 이유 없이 남을 시기했던 순간. 그 시절을 떠올리기만 해도 불안해지고 나의 모난 모습을 수면 위로 건져올리는 것만 같은데 여름과 루비를 읽으며 그 시절마저도 치열하게 아이로서 사랑받고 생존하기 위해 노력한 시절로 바뀌어가는 것 같았다. 여름과 루비 너희도 그랬겠구나.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두가 그들을 연민함은 결국 그들의 과거를 연민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일테다. 책을 읽으며 유년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졌고 더 어른이 되었다.
미처 경험하지 못한 모든 '처음'을 응원한다. 아무래도 어린 등장인물들과 어른들과의 관계도를 톺아보면 영화 [우리들] [우리집] 등 아이들이 주로 등장하는 영화작품들도 떠오른다. 영화든 책이든 보며 아이들이 후회보다 찬란을, 눈물보다 웃음에 더 가깝기를 바라게 된다. 이르게 온 상실 앞에서도 따뜻한 온도의 포옹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내가 갖지 못해서 아쉬웠던 유년의 어떤 기억들일 것이다. 그 기억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다른 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아이들을 더 사랑하고 싶다.
다음은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들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p.80)
“... 나는 누군가에 의해 자주 들어올려지고, 불려다녔다. 얼굴이 다 닳은 이파리처럼, 일찍이 시들어 있었다. 주로 고모가 불렀다. 여름! 여름!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아무때고 불리는 여름은 물론, 여름이 아닌 계절들까지도 긴장했으리라. 나는 녹지 않는 여름이었다. 녹을 기회가 없었다.” (p.12)
독백이 너무 어른스럽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 어린 시절에 어려운 단어 하나를 들으면 그 단어를 자주 쓰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았나. 다들 다 커버린 느낌이 들어 작은 몸이 불편할 때도 있었고 느리게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는 계절의 움직임도 보았을 것이다. 여름과 루비는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시인의 문장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어떠한 시절로 말할지, 있었던 유년으로 말할지에 대해서 고민할 뿐이다. 모든 유년에 박수를 친다. 자라느라, 어른이 되느라 고생했던 오늘 우리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책을 읽게 될테고 책을 덮고나면 붉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