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일까? 음악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소리라면, 시는 언어를 조직하는 한 방식이다. 언어를 특별하게 빚어내면 시가 되고, 시가 되면 기억되고 가치를 부여받는다. 언제나 목적을 달성하는 건 아니다. 수세시가 흐르는 사이 까맣게 잊힌 시가 수천수만 편에 달한다. 이 간략한 역사는 잊히지 않은 소수의 시를 다룬다. 이 책은 기본 적으로 영어권, 대체로 영국과 미국의 시가 발전해온 역사를 중심에 두고 있다. 시는 모국어를 떠나는 순간 시로서 존재 가치를 적어도 절반 이상 잃게 될 것이다. 언어를 모른다면 시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따라서 영어로 쓰인 시가 아닌 경우 오로지 변역으로만 접해야 하는데, 이미 모국어를 잃은 번역된 시를 읽고 그 시의 본질을 논한다는 게 가능할까. 물론 모든 문학은 번역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시는 유달리 그렇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단어 하나 단체할 수 없다는 대체 불가능성, 절대적인 유일무이성이 곧 존재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타국어로 '옮긴다'는 행위는 반달리즘이 무색한 파괴의 작업일 수밖에 없고, 언어권 밖의 사람이 시를 이해하려 들 때의 한계는 너무나 참담하게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세기에 걸쳐 까맣게 잊힌 수천수만 편의 시가 있으나, 끝내 잊히지 않는 소수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정말로 빛나는 시성은 시간과 장소는 물론, 언어마저 초월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시가 한편도 없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흐르느듯한 느낌의 시는 이 가을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나는 고전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책에 나오는 전쟁, 모험, 사랑이야기 호메로스편이다. 시기는 대략 기원전 700년으로 추정된다. '일리아드'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최초의 전쟁시다. 이 서사시는 10년에 걸친 트로이 포위전의 마지막 몇 주일에 걸쳐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이 맞붙은 전투를 묘사하며 트로이군의 총지휘관인 헥토르가 그리스전사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음을 맞는 지점에서 막을 내린다. 이 시는 전쟁에 대해 상충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쟁은 영광이자 공포로 그려진다. 비겁함은 경멸을 사 마땅하다. 그러나 전쟁의 잔혹성과 무의미 역시 폭로된다. 이 모순은 전투 장면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다른 스타일에도 반영된다. 전사들은 서로 격식을 갖춘 수사적 언어로 웅변가처럼 대화한다. 그러나 죽을 때는 도살되는 가축과 다름없다. 창이 입안으로 날아와 치아와 뼈를 박살낸다. 창끝에 꿰인 청년은 전차에서 떨어져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꿈틀거린다. '일리아드'에 기록된, 전쟁에 대한 감정적 분열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현충일 추도식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전쟁의 영광을 찬미하고 헛된 희생을 통탄하는 행위는 언제나 병존한다. 우리 내부의 이런 괴리를 드러내 보이는 '일리아드'가 보편성과 깊이를 담보하는 이유다. 또 한가지를 짚자면 인간 감정의 묘사다. 서사시의 행위에 개입하는 신과 여신들-제우스, 아폴로, 아테나 아프로디테등은 경박하고 사악하고 졸렬하며 호전적이다. 그리하여 신들에 대조되는 인간들이 품격 있고 숭고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인간은 참된 아픔과 슬픔을 느끼며 영웅으로서 우뚝 설 수 있으나 불멸의 신들은 그럴 수 없다. 이 시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6권에서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흐느껴 울며 남편에게 전장에 나가지 말라고 설득하는 대목이다. 헥토르는 자신이 출전하지 않으면 트로이의 남녀 앞에서 '깊은 치욕'을 느낄 거라고 말한다.
겁쟁이처럼 움츠러들어 전투를 회피한다면.
if like a coward I were to shrink asde from the fightimg.
헥토르는 자신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을 운명이며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과 함께 트로이가 파괴될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내의 간청을 거절한다. 두 사람의 '별처럼 아픔다운'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안고 있는 유모가 그 자리에 있다. 아이는 아버지의 갑옷과 투구에서 맹렬하게 흔들리는 말총 술을 보고 공포로 울부짖으며 도망치려는 듯 유모의 품을 파고든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는 겁먹은 아들을 보고 함께 웃지만, 헥토르는 빛나는 투구를 벗어 땅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들을 안고 키스하고 품 안에서 어르며 기도한다.
제우스여, 그리고 다른 불멸의 신들이신여, 내 아들인 이 아이가,
나처럼, 트로이인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되게 해주소서.
나처럼 힘이 세어 일리온의 강력한 지배자가 되게 허락하소서.
그리고 언젠가 전투에서 돌아오면 세간 사람들로부터 '그는 아버지 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평판을 듣게 하소서.
적군을 죽이고 피 묻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와 제 어미의 마음을 기쁘게 하소서.
기도를 마친 그는 아이를 아내 안드로마케에게 건네주고, 안드로마케는 '눈물 가운데 미소를 띠며 향기로운 가슴에'아기를 품는다. 헥토르는 아내에게 측은한 마음을 느끼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때가 오기전에 그를 하데스로 보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로 아내를 위로한다.
이 짧은 장면에 대해 쓰인 글은 수천 단어를 훌쩍 넘는다. 이 장면은 전투 장면에서 본 전쟁에 대한 분열된 반응을 가정이라는 배경으로 옮겨온다. 우리 눈에는 어린 아들이 살인자로 자라나 다른 인간의 피를 뒤집어쓴 채 전장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헥토르가 끔찍해 보인다. 이런 미래를 기도하다니 짐승이나 할 짓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헥토르가 야만적인 짐승이 아님을 명백히 알아보게 되어 있다. 헥토르는 다정한 마음으로 아기를 사랑하며 슬픔에 빠진 아내를 위로하려 애쓴다. 그리고 싸운다 해서 그 어떤 위업도 이룰 수 없음을 예감하고 있다. 자신과 아버지와 트로이가 죽을 운명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전장으로 돌아가 군사들과 합류하는 행위는 실용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헥토르의 의무감을 이해한다.
그래서 '일리아드'는 비극이다. '일리아드'의 음울한 현실주의와 비교해서 '오디세이아'는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많은 다른 시와 달리 호메로스의 작품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도 크게 훼손되지 않는데, 그 이유를 하나 들자면 서술 기법의 단순성,, 속도감, 직접성이다. 많은 번역과 유명한 작품으로 탄생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작가인 호메로스가 누구였는지, 호메로스 서사시가 한 시인의 작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