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볼때 원작자가 김탁환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며, 그다지 작가를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가 최근들어 도서관에서 뱅커라는 소설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김탁환이라는 작가를 달리 보게 되었다. 필력도 대단하고 소설의 짜임새가 아주 튼튼하게 구성되어 있어 어디 흠잡을데가 없고,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만 하게 된다.
이번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을"은 소설속의 소설로 조선중기의 소설가와 정치계의 음모를 아주 멋있게 그리고 있다. 장희빈과 김만중과의 관계도 역사적사실도 어느정도 넣어가며 흥미진진하게 그려 놓고 있다.
다음은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하고픈 명문장을 적어본다.
10년 동안 흰머리산의 왕으로 군림한 호랑이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양지바른 자작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려는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은 벌레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기력이 다한 호랑이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살점을 조금씩 뜯어냈다. 고통을 참지 못한 호랑이가 고개를 들고 허으응 울음을 울어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앞발만 쓸 수 있다면 단번에 짓밟겠건만 땀과 침과 피가 뒤범벅이 된 백수의 왕은 비참한 최후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거나 언덕에서 바위가 굴러 단숨에 생명줄이 끊어지기를 빌었지만 그런 행복은 찾아들지 않았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쥐더라도 선정을 펴지 못하면 벌레만도 못한 민초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연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멋지게 지켜 낸다. 그러나 나는 소설의 빛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매설가일 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쏟아져 들어온 연의소설은 조정의 당상관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다. 공식 석상에서는 비판하면서도 숨어서는 그 재미를 만끽하였던 것이다. 소설을 멀리하는 것이 군왕과 사대부의 도리지만 나라에서 어떤 소설을 금하여 불태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소설이 유통되는 것을 알면서도 묵살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소설은 많다. 구운몽을 보라. 소설 앞뒤에 불문의 깨달음이 덧씌워져 있지만 결국 여덟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런 소설을 지었다고 김만중이 곤혹을 치렀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다. 여자라면 목숨을 끊을 일이지만 남자에게는 여유요 능력이며 영웅다움의 징표였다.
구운몽에는 불가적 삶과 유가적 삶이 한데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성진의 고뇌와 양소유의 쾌락, 여덟 선녀의 개성과 미모가 치우침 없이 유려하게 담겨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삼국지연의 처럼 파란만장하지도 않고 수호전처럼 영웅호걸들이 모여 대의를 도모하지도 않으며 서유기처럼 인간 세상을 비웃는 요괴들이 등장하지도 않지만 세 작품의 장점이 고루 실려 있었다.
"스승은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를 먼저 살리파고 하셨습니다. 쓰고 싶은 욕망이 차고 넘치면 감당할 수 없는 글까지도 짓게 된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함부로 덤볐다가는 좋은 소설을 지을 수 없고 몸까지 상한다고 하셨습니다. 지우고 지우고 또 지워 가다 보면 쓸 것을 만나게 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난 불가의 가르침을 한 단어로 말할 수도 있네. 그건 바로 진공묘유야. 진공이란 차 있는 것이 비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고, 묘유란 비어 있는 것이 차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거라네. 나는 공맹의 가르침이나 석씨의 도리보다도 성진이자 양소유인 한 인간의 고뇌가 소중하다고 보네. 그 많은 성현의 가르침도 따지고 보면 인간을 돕기 위한 방편일 따름일세."
죽을 때는 모두 혼자라지만 더불어 사는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소설이 흥미진진하고 복잡할수록 매설가의 삶은 단순하고 재미없다. 소설에 담긴 풍광이 밝고 아름다울수록 매설가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어찌 알랴. 식솔을 거느리려면 소설쓰기를 그만두어야 하는데 소설을 쓰지 않고는 식솔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
맹자는 노자를 배척하지 않았고, 예의에 투철하지 못한 사람은 장자를 깉이 보아야 한다.
인간 세상에는 뜻화지 않는 변고가 있고, 좋은 일은 귀신이 시기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날지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항상 이것이 근심스러워 마음이 절로 슬퍼지곤 합니다.
굽었다가 펴지고 가득 찼다가 텅 비게 되는 것이 천도의 향상된 이치요 길흉과 회한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당연히 겪을 일일 것이오. 만약 불행히 하늘에서 부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어떻게 슬픈 처지를 한탄하면서 몸과 마음을 게을리할 수 있겠소? 부질없는 근심과 고민으로 즐거운 마음을 해칠 필요는 없소.
오래 앓은 사람은 세상 이치를 몸으로부터 아는 법이라네.
소설 한 편 잘 지었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아. 하지만 어떤 조짐이나 버팀목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