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나, 황진이"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황진이 본인 쓴 자서전인 것 같다.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도 알수 있고,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황진이의 삶을 알게 되었다. 물론 황진이의 생각과 심리상태, 화담선생에 대한 존경심 등도 포함해서....
또 이 책의 특이한 점을 들라하면, 상상의 동물과 우리가 잘쓰지 않는 단어가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어휘의 확장이 무한대로 커진 기분이다.
이 책에서 기억하고픈 주요 문장을 적어본다.
장차 죽으려는 새는 그 울음이 슬프고 장차 죽으려는 사람은 그 말이 착하다고 했던가요. 세상을 향해 침 뱉고 으르렁거리며 욕하고 비웃으며 지내 왔는데, 이제 그 모든 칼날을 내 안으로 들이밀어야 합니다.
진, 참된 자. 그것이 어머니의 바람이었답니다. 당신은 비록 거짓말로 이 세상을 꾸몄지만 나만은 참된 길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삶을 스스로 택할 권리를 처음부터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거짓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거짓을 부리고픈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포기해야 했답니다.
잊혀 가는 고려의 곡조도 곁들이면 더욱 좋겠지요. 앞마당을 도열(집 안의 악한 기운을 쓸어내는 비)로 쓴 후 뒷마당에서 개수(철이 바뀔 때 계절에 맞는 나무를 비벼 새로운 불을 취함)하기에 적당한 날이로군요. 귀문관(저승문)에 당도했던 병자들도 걸음을 돌릴 것 같네요.
열 살을 넘겨 음률에 눈을 뜬 후부터는 거문고를 끼고 살았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여린 맛이 나는 가야금보다 단순하고 날카로운 듯해도 강하고 힘이 넘치는 거문고가 내게 더 어울렸습니다.
멈출 때는 바위아래 숨은 물고기처럼 고요하고, 움직일 때는 수달처럼 튀어 올라 적진을 괴멸시키는 상상. 산처럼 물러서고 질풍처럼 나아가며 호랑이처럼 싸우는 기쁨. 그 감동은 앉아서 거문고를 다룰 때보다도 열 배 스무 배 크고 다양합니다.
두주(첫머리의 산가지. 최고가 됨을 뜻함)를 쥐려는 맹목. 배움의 쓰임보다는 그 배움 자체의 경지를 살폈지요. 한계를 하나씩 넘어설 때의 희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 했을 때의 가슴 벅참. 그 배움을 연단에 비길 수도 있을 겁니다. 100여 근의 숯불로 단숨에 달군 뒤에야 비로소 약한 불로 마무리를 짓는 법이니까요. 급류를 오를 때는 빨리 그 위험을 뚫을 생각뿐이지요. 강 상류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피다가는 죽음을 면키 어렵습니다.
양반은 양반답고 아전은 아전다우며 기생은 기생다워야 한다는 규범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 다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어찌 그것을 내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를 나누듯 기생과 정숙한 여자를 또다시 나눈다고나 할까요. 이런 구분 자체가 가소로운 짓이지요. 세상에는 자기를 완성시켜 가는 인간과 자기를 파괴시켜 가는 인간, 이렇게 두 부류가 있을 뿐입니다.
서책을 통하면 세상 만물 모두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답니다. 비로소 우리의 삶이 학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깨달은 겁니다. 배움이 조금씩 깊어 갈수록 이 배움을 함께 나눌 지음이 그리웠지요.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편히 쉴 수 있기에 죽음은 좋은 것이라고 했던가요. 살아 있는 사람은 계속 길을 가는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고향의 품에 안겨 온갖 시름을 잊는 사람이라고 했던가요.
그는 눈 딱 감고 지나가자 했지요. 고운 것, 위대한 것, 맛난 것만 구경해도 100년 인생이 짧으니, 연꽃의 우아함만 살피면 되지 그 꽃을 피운 탁한 물에 구태여 손을 담글 필요가 없다고 했답니다.
신을 벗어 양손에 하나씩 쥐어 봅니다. 맨발의 자유로운 지혜를 얻기 위함이지요. 발바닥에 닿는 흙과 돌의 감촉이 도끼로 뒤통수를 맞은 듯 쩌릿쩌릿합니다.
어떤 오기가 가슴 저 밑바닥에 단단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늦지 않았다면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비껴 서거나 도망가지 않고 정면에서 맞서고 싶었지요. 두 눈 부릅뜨고 말이에요.
비망은 더 많은 잊음을 통해서만 획득되지요. 완벽한 한 권의 서책을 쓴다는 것은 완벽하지 못한 수만권의 서책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태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텅 비워 두는 편이 낫다고 했을 때, 스승은 배움이 크다고 칭찬하셨어요.
모도리(빈틈없이 야무진 사람)처럼 매사를 꼼꼼히 챙겼어요.
하늘에 앞서면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에 뒤지면 천시를 따르는 법이니, 선천은 곧 태허이고 태극이며 일기라고 하셨답니다. 이때의 일기의 일은 단순히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수의 본체라고 했어요. 이와 기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냐면 이는 기의 주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