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민주주의에 불만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사상으로서 민주주의 자체에 등을 돌린 것은 아니다. 밀레니얼 세대를 포함해, 민주주의에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아직 민주주의를 포기하지는 않은 이들은 민주주의에 마땅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것이 바로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이유이다. 시민들이 의회 같은 기구가 권위를 잃었다고 느꼈던 20세기와 현재가 다른 점이기도 하다.
이는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가진 정당들과 단체들이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의 이상을 비난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이자, 권위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인 척이라도 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자원을 동원하는 이유이다. 때로는 민주주의의 변형(예를 들어 반리버럴 민주주의와 같은), 심지어는 자기통치의 개선된 버전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이들의 말을 시민이 믿어버리는 일도 발생한다.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퇴보했거나 완전히 망가졌는데도 시민들은 여전히 자신이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같은 위선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오늘날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립서비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다고 당장 그들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며, 그러는 게 다른 종류의 권위주의 아래서는 불가능한 돌파구를 만들어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불편한 진실이 많이 남아 있다. 권위주의 정치인을 지지하는 유권자라고 해서 모두 숙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나름의 트레이드오프를 고려하기도 하고, 당파적인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수사와 행동을 수용하기도 한다. 과두 지배 엘리트는 물론 모두에게 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가 정치적인 지형을 재편해 시민들이 저쪽편에 붙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느끼게 되면 특히 문제다. 현재진행형인 문화 전쟁으로 인해 이런 인물들의 등장이 더욱 용이해졌다. 하지만 문화를 민주주의가 약화되고 있는 이유로 볼 수는 없다. 앞서 설명한 두 가지 분리 현상과 더 넓은 의미에서 불공평의 심화가 진짜 범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가 만들어낸 것이 무엇이든 간에 정치인들이 이를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양극화와 부족주의는 주어진 인간 본성이 아니지만 갈등이 어떤 식으로 그려지고 싸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따라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세번째 근거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서로 갈등하는 관계다. 자유는 특히 자원의 불공평과 결합해 정치적 불평등을 고착화하거나 꾸준히 약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가 없다면 이 같은 불평등에 맞서 싸울 방법도 없다.
민주주의는 동등한 권리를 의미하는 동시에 동등한 존중을 뜻한다. 봉건사회나 인종에 따른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와 달리 고개를 조아리거나 공포심을 갖지 않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체제다. 서로 존중한다고 해서 의견의 불일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서로 존중하면서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의견 차이가 입장 차이는 아니며 원칙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상대의 시민성을 부정한다는 뜻도 아니다.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갈등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가 관건이다. 패자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정치 체제의 존속이라는 명분 하에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희생하는 게임인지가 관건이다. 나의 정적이 옳을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상대가 지금 있는 자리에 언젠가 내가 갈 수도 있다고 상상 가능한 사회에서는 이것이 한층 더 용이해진다.
민주주의에는 규칙이 필요하다. 규칙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규칙은 불확실성을 제도화한다. 불확실성을 제도화환다는 말이 영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규칙을 기반으로 나오는 결과의 불확실성은 민주주의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면과 직결된다. 민주주의는 아이디어와 이해관계,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대표의 등장에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가능성 안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