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암흑시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살기 힘든 시대, 빛이 없어 암담한 시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 등의 이미지가 머리에 새겨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중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시대 말이다. 그런데 중세의 암흑 속에서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가 탄생을 했고,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최근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이 책이 나오기 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한 채, 잘못된 가르침에 따라 맹목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고,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신, 즉 우상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어느 목사님의 도서 추천에 이 책의 제목이 보였다. 현대인들이 중세를 오해하고 있다고? 무엇을 오해한단 말인가? 이런 호기심으로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책은 학자가 신문 컬럼에 연재하기 위하여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이 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 책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고 낯선 중세를 다룬 이야기들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으며, 신분 질서는 신이 만들었기에 이를 어길 시에는 신의 뜻을 거스른다고 가르친 신학자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은 광신자들, 파라다이스가 아시아 동쪽 끝에 있으며 지옥은 땅속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전염병을 신이 내린 벌로 간주하고 불임을 악마의 소행이라 믿은 사람들, 이자를 죄악으로 생각하고 이자 대부업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한 사람들, 하느님에게 왕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왕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성인들의 뼈를 숭배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 현대인들은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 참 중세 사람은 어리석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 당시 그 상황에서 태어나 살았다면 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인가?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지금 이 현대 시대의 감옥에 갇혀 중세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똑같이 이상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추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은행원으로서 중세에 "이자는 죄악이다" 라는 생각에 대한 그들의 오해에 대하여 관심이 많이 간다. 책에서는 우리가 유럽 역사에서 알고 있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용어와 그들의 역사에는 오해와 편견이 많다고 한다. 첫째, 고리대금업자하면 유대인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교 상인보다 기독교 상인, 특히 이탈리아 상인이 대부업을 주도했다. 둘째, 우리가 알고 있는 고리대금업자의 정확한 의미가 이자대부업자 전체였다는 것이다.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자가 높거나 낮음에 상관없이 원금 이외에 한푼이라도 더 받으면 그것은 '유저리usury' 였다. 이자는 큰 종교적 죄악이었고, 이자 대부업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 교회 묘지에 묻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기독교에서 이자가 죄악인 근거는 성경 여기저기에 있다. 엔리코의 아버지 리날도 스크로베니도 이자 대부업자였다. 그런 이유로 <신곡>의 저자 단테는 리날로를 지옥에 처박아 놓았다. 엔리코가 조토를 불러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자 대부업자 유다를 그리세 한것은 아버지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간절한 열망의 발로였다. 그것은 바로 엔리코가 무릎을 꿇고 예배당을 성모마리아에게 봉헌하고 마리아는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엔리코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탈리아 상인들 대다수는 이자 대부라는 죄를 씻기 위해 임종 직전 유언장을 통해 부당하게 수취한 이자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면서 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은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빌려준 돈을 약속한 시간에 돌려받지 못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돈을 빌려주게 되면 유리한 투자를 해서 합법적 이득을 얻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 등등의 이유로 어느 정도 이자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갔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자는 더 이상 불법적 경제행위가 아니다. 더욱이 이제 자본은 더 많은 힘과 권력을 차지하면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될 위치에 와 있다.
이렇듯 이자에 대한 개념이 중세-근대-현대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세의 교회의 이자에 대한 교리는 성경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부분들이 많다. 율법의 정신은 잃어버리고 형식에 매여, 예수님이 지적했던 장로의 유전을 이제는 성경에도 없는 교황청의 교리로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정말 현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지 참되게 분별해야 하고, 그들이 잘못된 해석으로 민중을 도탄에 빠지지 않도록 민도가 높아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