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이 번역되어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중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높게 꼽는 작품은 맨 처음 읽었던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논리적 추론과 따뜻한 감성이 한 작품에 잘 어우러져 있는 소설이었다. 과학에 근거한 추론과 반전을 통한 감동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란 작가를 알게 되었고, 이후 그의 작품은 나오는 족족 거의 읽게 되었다. 작가 소개에 나온 ‘공대 출신’이란 점이 관심을 끌었고, 그래서 이런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작품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는 형사 구사나기와 데이토대학 물리학과 교수인 유가와였다. 유가와의 별명은 갈릴레오였고.
이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탐정 갈릴레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데이도 대학 물리학 교수 유가와 마나부와 그의 친구이자 경시청 형사 구사나기 콤비물로 구사나기 형사가 난제에 부딪쳤을 때 유가와 교수가 물리학적인 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용의자 x의 헌신>이 가장 유명한데 공교롭게도 나 또한 이 시리즈를 제외하면 한 번도 이 콤비를 만난 적이 없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출간하는 작품 수가 많다보니 놓쳐버린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물 중 가장 많은 작품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2012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9년 만에 한국에 출간되었지만 생각보다 옛 것의 느낌은 없다. 다작을 하는 만큼(글공장 수준이다) 퀄리티가 복불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거의 다 좋아한다. 일단 가독성이 좋은데다가 몰입도가 꽤 높다. 트릭이 다소 엉뚱하거나 모순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사실 나는 추리 소설을 읽을 때 범인을 맞추는 경우가 많지 않고 맞추는 경우도 동기나 살해 방법은 전혀 맞추지 못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실제로 크게 모순점을 알아차리거나 하지 않다.
사설로, 나는 특히 유가와가 등장하는 갈릴레오 시리즈를 좋아한다. 갈릴레오 시리즈는 주로 단편들이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소설의 트릭을 시험해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복잡한 인간관계없이 사건에 쓰인 트릭에만 집중하고, 그 트릭을 과학적인 논리와 실험으로 증명하는 스타일이 맘에 든다. 꽤 오랫동안 갈릴레오 시리즈가 소개되지 않더니 비로소 나온 게 바로 《허상의 어릿광대》다(서지를 보니 일본에서 나온 건 2015년이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다. ‘현혹하다’, ‘투시하다’ 등 각 단편의 중심되는 내용을 동사로 나타낸 것부터가 갈릴레오 시리즈의 특징이다. 제목만 보면 모호하지만 다 읽고 나면(아니면 읽는 중간에라도) 정말 내용을 잘 나타내는 제목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를테면 <들리다>는 환청을 소재로 했고, <연기하다>는 그야말로 ‘연기’에 관한 단편이다. 그런데 소재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 동사의 이면을 과학의 원리로 밝혀내는 것이 바로 유가와의 활약인데, <현혹하다>에서는 신흥종교의 ‘현혹’의 과학을 밝혀내고, <투시하다>에서는 투시력 마술의 과학을 밝혀낸다. 통쾌하다기보다는 ‘아하!’하는 느낌을 주는 방식이다.
이 중 <위장하다>는 《용의자 X의 헌신》을 연상케 한다. 유가와가 단지 조언에 그치지 않고 사건의 최종적인 해결사로 나서는 작품이기도 한데, 사건의 해결이 범인을 찾고, 벌어진 일을 모두 밝혀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차가운 이성과 더불어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한 감성’이다.
거의 끝까지 읽으면서도 이 소설집의 제목이 ‘허상의 어릿광대’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마지막 소설 <연기하다>이 그 이유를 알려준다. 유가와는 유리창에 비친 ‘허상의 불꽃’을 단서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해냈다. 그런데 다시 돌이켜 일곱 작품을 모두 보면 ‘허상’을 좇는 이들이 등장한다. 남을 속여 거짓 믿음을 유도하고, 장부를 위조하여 회삿돈을 횡령하고, 발명품을 남을 괴롭히는 데 이용하고, 유산을 노려 아내를 살해하고, 살인과 범죄의 기분을 느끼려 범죄를 은폐하는 연기를 하고... 하기사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이든 허상을 좇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그런 생각이 범죄로 연결되는가 와는 상관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