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코스톨라니는 증권투자의 원로였다. 하지만 증권가의 스승, 코스톨라니에게 특별한 비법을 기대한 사람은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매번 특별한 비법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하곤 했던 것이다. 특별한 비법은 조재하지 않으며, 이는 특정 주식을 팔아 대중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은행이나 투자 관련 단체의 수작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35년간 칼럼과 책을 통해 수많은 조언을 건넸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세계적인 우량주를 사들인 다음 약국에서 수면제를 사서 먹고 몇 년간 푹자라 는 것이었다. 이 조언을 마음에 새긴 사람은 그의 말처럼 편안한 즐거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젊은 부모들에게도 현명한 조언을 남겼다. 아이들의 교육에 투자하십시오. 누구의 입에서나 나올 수 이쓴ㄴ 판에 박힌 말 같지만, 코스톨라니는 자신의 경험으로 그 말의 무게를 더했다. 그가 열여덟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는 그를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는 친구가 있는 파리로 유학을 보냈다. 이런 교육을 통해 그의 부모는 전쟁과 공사준의로 인해 전 재산을 잃은 후에도 막내아들 앙드레가 재정을 지원해준 덕분에 스위스에서 평온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인생을 즐기십시오 부다페스트에서 아우디 A8을 타고 가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조언이었다. 이 말은 그가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삶의 마지막까지 실천했던 그의 원칙이었다. 앙드레 크소톨라니는 다방면으로 인생을 즐겼다. 특히 그는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다.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를 무려 100회 이상 관람했으며, 슈트라우스와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도 했다. 클래식을 듣고, 고급 시가를 피우고, 증시에 대해 고찰하는 일은 언제나 그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다만, 훗날 건강상의 이유로 담배는 끊어야만 했다. 친구들은 평소 그를 코스토라고 불렀다. 코스토는 평온한 인생뿐만 아니라 그의 일까지 즐겼다. 청중이 그를 필요로 했던 것만큼 그 또한 청중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코스토에게 확신과 젊음을 선사했다. 인터뷰와 토론장에서 그의 생생한 활력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웃으며 정신적 체조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화와 맞서 싸우는데 음악 감상과 신중한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도전을 이어나갔다. 1998년만 해도 30회가 넘는 강연을 했고,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했으며 여러 인터부에 응했다. 비행기, 기차 혹은 차를 타고 정거리를 이동한 후 마침내 그의 두 다리로 강단에 오르기까지 몹시 고된 일정 속에서도 '미스터' 코스톨라니는 강연이 끝날 때까지 주최 측에서 마련한 안락의자에 앉기를 거부했다. 언제나 두 손으로 연단을 세게쥐고 쾌활하고 밝은 모습으로 강연에 임했다. 그럴 때마다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하며 유머로 가득한 60~90분이 이어졌고, 결국 기립박수로 강연을 마치곤 했다.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어느새 두 세대에 걸친 독일 증권거래 시장의 우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유명인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젋은이들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자칭 증시의 방랑 연설자가 되기 전에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에서 거주하거나 그의 두번째 고향인 뮌헨에 머물렀다. 뮌헨에 도착하면 점심때마다 히포 아케이드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저녁에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호프집으로 향하기 전 오후에는 규칙적으로 낮잠을 즐겼다. 1917년 이후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쉬지 않고 돈과 주식에 몰두햇지만 실리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투자에 임할 때 심혈을 기울인 건 돈 그 자체가 이니었다. 자신의 생각이 정당성을 인정받는 순간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더 컸다. 그는 스스로를 주식투자자라고 불렀다. 그에게 있어 주식투자란 지적인 도전을 의미했다. 그는 항상 돈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며, 이를 성공한 주자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코스토는 탐욕스럽지도, 기세등등하지도, 돈자랑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