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이후 아바스 제국의 약화로 분열되었던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제국이 13세기 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등장하였으며 다민족·다종교 국가로서,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개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며 시작된다. 셀주크 튀르크는 1055년 바그다드에 들어와 아바스 제국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고 소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며 그 지역을 이슬람화 했디. 셀주크 튀르크가 이스라엘을 차지하며 기독교도의 순례를 허용하지 않으며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후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를 포함하여 텐샨 산맥까지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이르는 제국을 형성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장기화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셀주크 튀르크는 멸망하지만 중앙아시아에 살던 튀크르 유목민들이 점차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이동하며 곳곳에 나라를 세우는데 그중 하나가 오스만 제이가 이끄는 오스만 공국이었고 오스만제국의 모태이다. 뛰어난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발칸 반도의 비잔티움을 대부분 정복하였고 콘스탄티노플마져 마호메크 2세에 의해 점령하는 위세를 떨치게 된다. 수도의 이름도 이젠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꾸고 마호메트 2세가 죽은 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정점을 찍고 황금의 시대를 연 황제는 쉘레이만 1세이다. 다양한 민족이 사는 제국의 경우에는 민족과 풍습, 종교도 다 달라 통치가 어려우나 쉘레이만은 차별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래서 법전을 편찬하여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했고 민족과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이 있는 자를 채용했고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다. 이슬람교 외의 종교를 선택하면 세금을 조금만 더 내게 하였다. 이렇게 내부는 정치 조직과 행정 제도를 정비하면서 제국의 힘과 부를 증대시킨 쉘레이만은 헝가리와 합스부르크 공략에 나서면서 동유럽으로의 진출을 시도한다. 오스만 군대의 강력한 공격에 맥을 못추고 무너진 헝가리로 인해 유럽은 공포에 사로잡혔히게 되나 황금시대를 연 쉴레이만 1세가 죽자, 오스만 제국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이유는 지중해 무역권을 빼앗긴 유럽에서는 점점 군대를 키우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무역항로 개척으로 신대륙 아메리카도 발견하며 지중해 무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식민지 개척으로 급성장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카톨릭 세력과의 레판토 해전(1571년)에서 크게 패배하며, 오스만제국은 지중해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쇠락하는 전기를 맞이하게된다. 결국 16세기 말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다. 유럽과의 여러 전투를 겪으며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유럽의 발전된 과학 기술과 군사 조직에 유럽에 훨씬 못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으나, 이를 정치력 강화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시도하여 정책적으로 군사력을 늘리는 등 방법으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무라드 4세는 사파비 왕조에게 점령당했던 예레반과 바그다드를 회복했하였으나 무라드 4세 사망 이후 전국적으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메흐메드 4세 집권기에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열강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특히 1683년에 제 2차 빈 포위공격에 실패한 뒤로는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국내적으로도 술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가 내부의 분열을 겪었다. 셀림 3세는 오스만 제국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구식의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니자미 자디드운동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개혁을 시작한 부문은 군사분야로서, 신식 무기를 도입하고, 유럽식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세율을 낮추고, 행정 제도와 외교 방식을 서구화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종교 지도자와 구식 군사 집단인 예니체리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압둘마지드 1세는 탄지마트라고 부르는 또 한번의 대규모 개혁 정책을 단행했고, 탄지마트의 일환으로 왕실 수비대를 양성했으며, 종교의 자유, 공정한 과세, 교육 제도, 지방 행정관 파견, 도로망, 운하, 철도의 확대, 근대화된 자본 운영, 은행 설립 등이 추진했다. 그러나 탄지마트 운동도 기득권층의 반발,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 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영국의 지원 없이는 개혁 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영국은 사실상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크림 전쟁을 일으켜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참전을 조장했다.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러시아로부터 발칸반도과 코카서스의 일부 지역을 탈환했으나 실질적인 이익은 얻지 못했다.
서구의 내정 개입과 술탄의 실정이 이어지자 유럽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술탄 압둘하미드2세에게 강요하여 근대적·자유주의적 헌법을 발포하게 했다. 그러나 술탄은 이듬해 이 헌법을 정지시키고 절대주의적 전제정치를 강행했고, 1908년 이에 반대하는 청년 장교들이 청년튀르크당을 결성해, 군대의 압력으로 술탄에게 헌법·의회정치의 부활에 동의하게 했다. 이것이 청년튀르크당의 혁명이다. 이후 청년튀르크당 내각이 조직되었고, 그 정권하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독일측에 서서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그 결과로 가혹한 세브르 조약에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 대국민의회를 소집하고, 1922년 11월 술탄 정부의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