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 한산까지 관람하고 이순신장군을 되새겨 보니 문득 난중일기 전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 진 나 자산을 보았다.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 간혹 이리저리 내 앞에 나타나고 사라졌던 장군의 이름 석자를 잡고 싶었지만 놓여주고 놓여주고 하면서 흘려보냈던 흐릿한 기억을 문득 황현필 유투브 시청 중 그가 지은 이순신의 바다가 끌어올려 주었다. 어릴 쩍 수학여행 현충사 참배부터 아지랑이 같은 난중일기(소설인지 만화인지 기억나지 않지만)까지 잊혀진 기억을 되돌리고 싶은 욕구를 본 도서가 채워주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풀어내지 않았나 싶다.
이순신장군은 47세(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발령 받았는데 일본이 침략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한 것 같다. 이순신장군은 5관5포(육지 및 수군행정구역)의 병력 충원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했으며 행정력에도 최선을 다했다. 수전에 임해야 하기 때문에 전선을 제대로 갖추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초 조선의 주력선은 맹선이었지만 판옥선으로 개조하고 건조를 독려하였다. 맹선은 일반적 함선으로 일본 전함의 갑판이 더 높아 조총이나 활로 공격할 경우 속수무책이라 함선의 갑판을 더 높인 것이 판옥선이다.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이 가장 부족했던 전라좌수영의 판옥선 수가 적지 않았던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원거리 공격을 강화하기 위해 판옥선에 함포를 장착했다.
거북선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충무공행록에 의하면 크기는 판옥선만하며, 위를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는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이 있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서 사방으로 발 디딜 곳이 없도록 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입은 총구멍이 되며 뒤는 거북의 꼬리처럼 되었는데 꼬리 아래에도 총구멍이 있고, 좌우로 각각 6개의 총구멍이 있다. 거북선은 전라좌수영 본영에서 1척, 순천부에서 1척, 방답진에서 1척씩 모두 3척이 건조되었다. 거북선의 탑승 인원은 150여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거북선은 2층설과 3층설이 대립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3층설이 굳어지는 추세이다.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이 진수되었으나 다음날 4월 13일 왜군은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압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판옥선, 거북선 등 우수한 선박의 제조기술도 있지만 막대한 화포와 화약의 비축도 당연히 포함되고 있다. 세종대왕시절부터 많은 화포를 제작하였고 각 포들은 크기에 따라 천자문의 순서대로 천, 지, 현, 황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명종 때는 조금 더 개량된 형태의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이 만들어졌고 임진왜란을 준비하며 선조 때 만들어진 현자총통(1,000보)은 화약 낭비가 적어 널리 사용되었다. 황자총통은 가장 작은 소형 화포로 사정거리는 1,100보이니 대략 1km이다. 이러한 조선의 화포들은 튼튼한 판옥선의 갑판 위에서 함포로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순신장군의 3대 대첩을 꼽는다면 한산도대첩(1592.7.8), 명량대첩(1597.9.16) 그리고 노량해전(1598.11.19)이다. 한산과 명량은 영화로 대체하고 마지막 장군의 해전으로 칭송되는 노량(이 또한 조만간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이순신장군역에 배우 김윤석 예정)으로 정리코자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왜군들은 본국 송환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무사 귀향을 용납하지 않았던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책으로 왜군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왜성, 시마즈 요시히로가 사천왜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순천왜성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상 최대의 급선무였다. 이순신과 진린에 의해 바닷길은 막히고 도처에 깔려 있는 조명연합군 때문에 육지를 통해 부산으로 탈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던 고니시는 명나라 사령관 유정을 구워 삶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탐욕스런 진린에게 상당한 수준의 뇌물을 주어 순천왜성 포위망을 풀게하였다. 그러나 바다는 조선의 바다였고 이순신장군의 바다가 아니였던가. 조선의 함대는 포위망을 풀지 않고 있었고 혹시 모를 고니시의 도망을 대비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선발대 10여 척이 조선의 함대에게 발각되어 몰살당하자 다시 순천왜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니시는 사천왜성의 시마즈에게 도움을 받아 노량해협에 들어왔다가 이순신장군과 억지로 참전한 진린과 명나라 수군에게 500여 척이 수장되었다. 1598.11.19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노량에서의 전투는 오후가 되어서야 고요해졌다. 그제서야 이순신장군의 전사 소식이 들려왔다. 바다와 산천초목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