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한 사람을 성숙시키는 길이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개체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을 사려 깊게 만드는 도구 같아요. 공부가 익을수록 우리는 관계를 보살피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죠. '삶으로서의 공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태도를 가까이에서 보며 공부가 축적되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를 감지해 볼 수 있었습니다." (293쪽)
좀 전에 중3 아들에게 또다시 잔소리를 했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쓸모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바로 후회한다. 그 맘 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게 마련인데 어른이랍시고 보이는 게 다르다며 푸념을 늘어놓게 된다. 아무튼 두 아들을 키우며 난감한 경우가 여럿 있었는데 갈수록 강도가 세지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이래서 아이를 키우며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는 세계와 아이들이 보는 세계는 너무도 다르다. 보는 것이 다르니 사랑으로 말해도 엉뚱한 답변만 돌아온다. 이해가 안 되니 행동 또한 당연히 안 따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파악도 못한 채 아들과의 간극은 벌어져만 간다. 한창 애교 많고 붙임성 좋았던 둘째가 저러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결국 이때쯤 발생하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호기심이 발동한 것 같은데 결국 세월이 약이려나.
그러나 그냥 보고만 있기에 시간은 한정적이다.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교감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제일 눈에 띈 것은 상담사들의 동영상 강의였는데 유머러스한 진행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소개되고 있었다. 몇몇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으며 특히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공감 또는 호감의 표시는 매우 실전적인 접근을 가져왔다. 다음에 찾은 것은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교육에 대한 책이다. 역사학자나 물리학자, 심리학자 또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교육에 대한 관심은 매우 심오하며 깊이가 있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따라 해도 될까 싶은 내용도 여럿 있었는데 눈에 띄는 대목이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라는 말이다.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관심 끊고 스스로 알아서 해낼 때까지 기다려 주라는 말이다. 부모는 환갑이 된 자식도 아이로 본다는데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중학생만 되면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웬걸 중학생이 되니 언제 사고를 칠지 몰라 더 불안하다. 과연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의 핵심은 관계이다.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관계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대응 방식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풀이 중 하나를 오늘 소개하는 책 『최재천의 공부』에서 찾았다. 책은 최재천 교수와 안희경 저널리스트가 2021년 4월에서 2022년 1월 사이에 나눈 대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최재천 교수의 삶과 시행착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그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상을 들어보고, 공부의 뿌리에서 변화까지 100세 인생에 필요한 배움과 깨움에 관한 생각을 담았다.(일러두기 中) 책의 구성이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읽고 이해하기 편하며, 무엇보다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느낌의 편집은 진솔함을 더해준다. 한 마디로 읽을수록 가슴이 따스해지는 책이다.
"다윈은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보여줬어요. '내가 중요하다. 내가 변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중심이다. 내가 그 주체다.' 바로 이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신 분이에요. 서양의 2,000년 사고 체계를 뒤집어버린 사상가입니다." (168쪽)
책의 구성은 공부의 뿌리, 공부의 시간, 공부의 양분, 공부의 성장, 공부의 변화, 공부의 활력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각의 특성에 맞게 장을 나누었는데 전체가 하나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책 전체를 꿰뚫는 획이 있어 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최재천 교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워낙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자신의 소신을 밝히신 분이라 오며 가며 한 번쯤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그는 '평생 자연을 관찰해온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0여 년간 중남미 열대를 누비며 동물의 생태를 탐구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명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널리 나누고 실천해왔다.'(책 속의 소개 저자 中) 이후 그는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한국생태학회장,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생명다양성 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다.
저자의 약력을 이렇게 길게 나열한 이유는 그의 삶 속에서 현재의 그를 만든 요체, 즉 환경적 영향에 따른 삶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인정하는 말이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까지 인간은 월등한 종속으로 동물과 구분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동물과 비교하는 것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조차 기분 나쁜 일로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 지구를 지배하는 다수 종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자연 속에 포함된 일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최재천 교수는 이 부분을 유난히 강조한다. 인간이 홀로 살 수 없듯이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알아야 한다. 무조건 암기를 해서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호기심이 권하는 곳으로 뱃심을 가지고 다가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정규식 교육보다 대안교육, 즉 자연과 함께 한다거나, 정해진 패턴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관찰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독서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독서는 빡세게 하는 겁니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집니다.(·····) 책은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발명품인데, 그 책을 취미로 읽는다? 이건 아니죠.(······) 우리는 기획서를 작성해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치밀하게 기획해서 공략해야죠. 한 번도 배우지 않은 분야의 책을 공략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144쪽)
공부의 시작에는 입력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입력 장치로는 책 읽기만 한 것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심층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것이 책이기 때문인데 지금은 예전과 달리 전문서적도 수없이 널려 있어 마음만 먹는다면 못 배울 것이 없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정해진 길만 가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심은 정해졌는데 정규교육에 메여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입력을 통해 새로운 조합을 찾아내고, 더 나은 것을 향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암기식 교육으로는 한계가 있다. 또한 시간적 제한도 마찬가지다. 꼭 이 시기에는 이 정도까지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우리의 아이들이 병들고 있다. 무리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저능아 취급을 받는 상황은 새싹이 돋아나기도 전에 짓밟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출발이 더딘 아이들도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최재천의 공부』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최재천 교수의 공부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물론 100%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글쓰기에 있어서는 수없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반대의 경우도 많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초고의 틀을 준비한 뒤에 섬세하게 접근하는 방식이 더 사용빈도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은 최재천 교수의 특별한 재능일 수 있으니 참고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공부가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처럼 명확하게 와닿은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생각하게 된다. 피상적이었던 공부하는 분야가 우리의 삶과 연계되어 하나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읽고 다시 생각하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