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홍차를 실헝하게 된 이유는 유럽에서 홍차를 마시는 문화가 퍼지자 유일한 홍차 수출국인 중국의 차 수출량이 단번에 증가했다. 재정난을 겪고 있던 영국 정부는 홍차에 200%에 달하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영국의 식민지 미국에도 영국의 영향으로 차를 마시는 문화가 있었는데, 세금 때문에 홍차값이 비싸지자 정식 수입된 차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보스턴 항에서는 밀수된 홍차가 총 거래량의 4분의3을 차지할 정도였다. 한편 영국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하며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식민지 주둔군의 경비를 충당하려면 추가 과세가 불가피했다. 이에따라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재수출되는 차에 붙던 관세를 폐지하고, 영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식민지로 수입되는 홍차의 과세를 강화했다. 그 결과 식민지에서 일시적으로 영국산 홍차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상인들이 세금이 들지 않는 홍차 밀수에 몰두하게 되자 영국 본토에서 수입되는 차의 양이 확연히 줄었다. 1773년 영국 정부는 판매 부진으로 대량의 홍차 재고를 떠안게 된 동인도회사를 구제하기 위해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런던의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재고품을 식민지에 떠념겼다. 손해를 무릅쓰고 싼값에 물건을 팔아치우는 전형적인 투매였다. 식민지에는 홍차가 그야말로 남아돌게 되었다. 위기를 느낀 밀매상을 중심으로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린 차 상자를 육지로 내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운동이 보스턴 항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새뮤얼 애덤스 등이 조직한 정치 결사 자융의 아들들이 운동의 중심에 섰다. 1773년 12월, 홍차를 가득 실은 동인도회사의 함선 3척이 거센바람 때문에 목적지인 뉴욕이 아닌, 밀무역의 중심시 브스턴에 입항하게 되었다. 영국 정부의 명백한 도전이었다. 그날 인디언으로 변장한 약 90여명의 급진파가 정박중이던 동인도회사의 배에 숨어들어 보스턴항을 티포트로 만들자 라고 외치면서 342개의 홍차 상자를 바다로 던지는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찰스턴과 필라델피아 등지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싿. 영국은 최선을 다해서 대항했다. 보스턴 항의 폐쇄, 영국 정규군의 메사추세츠 식민지 직접 통치 등 강경책이 쏟아졌다. 식민지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775년 영국군이 콩코드시에서 식민지 민병대의 무기 창고를 적발한 것을 계기로 영국군과 민병대 사이의 첫 무력 충돌이 렉싱턴에서 발생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발발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 미국은 프랑스의 지원읠 받아 간신히 독립에 성공한다. 한편 프랑스는 무리한 지원 때문에 재정이 바닥나게 되고, 이로 인해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이어지게 된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은 근대 시민 사회 형성의 계기가 되는 중대한 사건인데, 그 원인이 홍차에 대한 과세 문제에서 비롯했다는 점은 음식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서구화된 이슬람의 기호품 커피. 영국 문화권에는 홍차가 사랑받았지만 보다 대중화된 기호품은 사실 커피였다.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17세기에 이슬람 세계로부터 유럽으로 들어왔고, 런던 등 주요 도시에는 커피 하우스가 줄지어 늘어섰다. 17세기 후반에는 런던에 있는 커피 하우스만 3,000개가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커피콩은 이슬람 상인이 아라비아반도 남부에 위치한 예멘의 모카 항에서 독점 판매하고 있었다. 그들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커피가 해외에 퍼지는 것을 경계하여, 발아가 가능한 종자나 모종의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볶은 커피콩만을 수출했다. 이해타산이 빨랐던 네덜란드인은 커피의 상품 가치를 눈여겨보았다. 커피가 본래 아열대산이라는 것을 이용해 자국의 식민지에서 생산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서든 커피 생두를 모카항으로부터 가지고 나와야했다. 하지만 설탕의 대중화로 커피에 대한 수요는 계속증가했고 커피 재배만 성공하면 막대한 이익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18세기에 네덜란드인은 자바섬에서 다시 커피 재배에 나섰고 이번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픙토가 다른 지역에 작물을 옮겨와 키우는것이 쉬은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