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공적인 편지도 있고, 공개를 목적으로 한 편지도 있지만, 편지는 기본적으로 둘 사이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한 수단이다. 순전히 한 개인의 마음을 쓰는 일기와는 달리, 편지는 상대를 의식하면서 쓸 수 밖에 없으며 감정과 상황을 공유한다. 그래서 상황과 관계에 대해 더 맥락적이다. 지금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가 거의 대체하고 있지만, 그대로 시간을 두고(물론 급하게 쓴 경우도 있지만) 종이에 써 내려간 편지는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가 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우편함 속의 세계사』|작성자 에나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가 129통의 편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그것으로 세계사를 모두 설명하자는 게 아니다. 편지들로 역사를 연속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세계사의 한 장면의 이면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찮은 게 아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의 그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있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의 전개에 그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알 수 있다. 편지만으로는 앞뒤 맥락을 몰라 그저 글자로만 보일 수 있는 것을,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가 그 편지에 얽힌 상황을 간단하면서도 잘 전해주고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편지가 오래 남을 것을 알았겠지만, 많은 이가 이렇게 자신의 편지가 남아 자신의 내면을 이렇게 드러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저자는 역사학자인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라는 분으로, 고대 이집트와 로마부터해서 현대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와 시간을 아우르는 편지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도 폭군, 황후, 여배우, 예술가, 작곡가, 시인 등등 엄청 다양합니다. 1912년 조지아 출신의 34세 청년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는 16세 소녀 펠라게야 아누프리예바에게 연애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러시아 서쪽 항구도시 볼로그다에서 만났다. 청년은 소녀를 ‘섹시한 폴랴’, 소녀는 청년을 ‘괴짜 오시프’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청년은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 소녀에게 연서를 쓴다. “키스를 보낼게. 그냥 키스가 아니라 아주 열정적이고 진한 키스를 담아”라고 청년은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으로 바꾼다. 그는 러시아 혁명에 동참해 러시아 제국을 전복시키고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을 도와 소련을 세웠다. 30여 년간 소련을 이끈 정치인이자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독재자가 됐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인간이지만 편지에선 의외로 로맨틱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전 세계의 편지 129통을 모았다. 가족, 전쟁, 권력, 작별 등 18개 주제에 맞춰 편지를 추려 담고 해설을 덧붙였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가 자신의 팬에게 보낸 열정적인 편지, 독일 정치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소련을 침공하기 전날 밤 이탈리아 정치인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에게 보낸 전쟁을 암시하는 편지를 읽다보면 제목처럼 우편함 속에 세계사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빌마는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떠나기 전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숨을까도생각했지만 그래 봐야 가망이 없을 것 같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건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썼다.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 제공편지는 역사를 바꾼다. 훗날 영국 여왕이 되는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1544년 ‘피의 메리’로 불리는 이복 언니 메리 1세(1516∼1558)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편지를 썼다.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던 엘리자베스 1세는 감금되기 전 쓴 편지에서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만한 어떤 일도 실행하거나 조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한다. “폐하의 타고난 선하심에 희망을 건다” “폐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라는 말로 감정을 흔든다. 이 글이 힘을 발휘해서일까. 엘리자베스 1세는 죽음을 면하고 훗날 대영제국을 이끄는 왕이 된다 뛰어난 편지는 연설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1940년 영국 정치인 윈스턴 처칠(1874∼1965)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에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쓴다. 당시 처칠은 총리가 된 지 겨우 열흘밖에 되지 않았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뒤 영국 공격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칠은 “우리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소하면서도 영국이 패전한다면 “대통령께 남은 협상 카드는 오직 함대밖에 없다”고 도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