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속성을 ‘숙청’이라는 주제로 담아낸 책이 나왔다. 바로 ‘숙청의 역사’다. 1300여 년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주요 ‘숙청’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책에 담긴 한국사 주요 숙청의 장면들은 고대 통일신라 신문왕 ‘진골 숙청’부터 현대사 김영삼 문민정부 ‘하나회 숙청’까지 10가지의 기록을 광범위하게 짚어냈다. 모두 권력의 정점을 쟁취하기 위한, 그리고 또 다시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쟁투의 역사적 기록들을 다각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세밀한 필체를 통해 긴장감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책 속의 숨막히는 숙청의 상황들을 읽다보면 글 속의 표현들이 상상 속에서 현실감 있게 펼쳐진다. 그리고 당대 정치 사회적 배경과 사건 및 주요 인물들이 처했던 상황 등의 역사적 지식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면 책 속의 내용들이 작금의 현실 정치 상황과도 크게 무관하지 않게 느껴지면서 묘한 대비감도 이룬다. 바로 역사적 지식을 얻고 당시의 상황을 복기한다는 것은 현실의 유사한 상황에서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도 있다.
책의 저자는 “예로부터 숙청은 역사의 흐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며 “역사적 전환기에 주로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됐으며, 그 결과는 당대는 물론 이후의 역사를 규정지었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를 다루는 사극들은 거의 다 왕실과 사대부 세력의 갈등을 배경에 깔고 있다. 이런 사극 속의 왕실은 사대부들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tvN 사극 <청춘월담> 속의 왕실도 마찬가지다. 지난 13일 제11회 방송이 50분쯤 경과했을 때 묘사된 장면은 이 시대 왕실의 그런 분위기를 상당부분 보여준다.
제11회에서 임금(이종혁 분)은 우의정 조원보(정웅인 분)에 맞서는 세자 이환(박형식 분)을 꾸짖는다. "내 너에게 우상과 맞서지 말라 일렀거늘 어찌 이리 경솔한 것이냐?"라고 혼낸다. 세자는 그럼 저는 허수아비로 살아야 하느냐며 "아바마마께서는 단지 살아 있기 위해 보위에 앉아 계신 것이옵니까?"라며 대든다.
신하들은 샐러리맨이었기 때문에, 왕을 억누를 위치가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가 왕권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양반 사대부나 대지주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왕과 신하들이 대립한 게 아니라 왕과 귀족들이 대립했던 것이다.
그런 구도하에서 일반적인 군주들은 <청춘월담> 속의 임금처럼 귀족들과 타협하는 쪽을 선택했지만, 과감히 맞선 군주들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조선 전기의 연산군과 후기의 숙종이 그런 임금들이다.
연산군은 선비 출신 신하들을 폭력적으로 다뤘다. 사대부들이 화를 많이 입어 사화(士禍)의 시대로도 불리는 그의 시대에는 참혹한 장면들이 많이 연출됐다. 1498년 무오사화에 이어 1504년 갑자사화는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았을 정도다. 역사저술가 최경식의 <숙청의 역사-한국사 편>은 "갑자사화 때 시행된 처벌의 방식도 특기할 만"하다며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매우 참혹한 방식으로 시행"됐다고 한 뒤 이렇게 서술한다.
"당시 연산군이 행했던 처벌을 보면 포락·착흉·촌참·쇄골표풍·파가저택 등이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경국대전이란 기본 법전이 있었고, 형 집행을 할 땐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고, 매우 야만적인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
음력으로 연산군 5년 8월 16일자(양력 1499년 9월 20일자)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은 주인이 불에 달군 쇠로 여성 노비를 지진 사건을 거론하면서 "여성을 포락한 일은 매우 참혹하다"고 탄식했다. 이런 말을 했던 연산군의 시대에도 포락형이라는 끔찍한 수단이 동원됐던 것이다.
위에 언급된 착흉은 가슴을 빠개는 것, 촌참은 토막내는 것, 쇄골표풍은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는 것이었다. 파가저택은 집을 파괴하고 그 터를 연못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잔인한 방식이 이 시대 권력투쟁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숙종은 신하들을 죽여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연산군과 다를 바 없었으나, 연산군에 비해 폭력성을 훨씬 덜 드러냈다. 그는 양대 당파인 남인당과 서인당의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줘 집권당을 교체하고 국면을 전환시키는 환국(換局)의 방식으로 신하들의 힘을 빼놓았다. 사대부 세력 내부의 당쟁에 편승해, 약한 쪽에 힘을 실어주고 군주의 위상을 높여갔던 것이다.
연산군 때보다는 덜했지만 이 시기의 권력투쟁에서도 폭력성이 노출됐다. 숙종의 5촌 당숙인 복선군이 남인당 지도자 허적의 아들인 허견 등의 추대를 받고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남인당 인사들이 대거 숙청되고 서인당이 재집권한 경신환국(경신대출척)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위 책은 "역모 여부가 애매모호한 상황이었지만 숙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라며 "그는 궁궐의 경비를 강화한 후 중죄인들을 심문하기 위한 임시 관아인 국청을 설치해 연루자들을 국문했다"고 한 뒤 "허견과 복선군 등에게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라고 설명한다.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역모 혐의는 사실로 굳어졌고, 허견은 처형되고 복선군 등은 유배를 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 만큼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숙종 역시 가혹한 방식으로 신하들을 대했다. 김만중의 소설인 <사씨남정기>로 인해 장희빈(희빈 장씨)과 인현왕후에 끼여 유약하게 살아간 임금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것은 소설의 영향일 뿐이고 실제의 숙종은 상당히 가혹했다.
경종 즉위년 6월 16일자(1720년 7월 19일자) <경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을 겪어본 신하들이 그의 사후에 숙종이란 묘호(사당 칭호)를 만든 것은 그의 이미지가 강덕극취(剛德克就)했기 때문이다. 강직하고 덕스럽고 이겨내며 나아가는 이미지의 소유자라는 의미에서 숙종이란 묘호를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