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대항해 시대'니 '신대륙 발견'이니 인간이 해낸 모험적 과업 중에 가장 용감하고, 그야말로 위대한 성과라고 역사상의 기술들이 수놓은 그 역사의 이면에는, 그 시점에 거기 살았던 인간들의 시커먼 욕심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서구의 영광, 문명의 발달, 인간 지식의 진보의 시작 등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그 것들의 시작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은 후추 때문이었다." 서구 중세에서 그 희소함으로 인하여 황금의 가치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녔던 것이 향신료인 후추이다. 그것을 가져오는 자, 온갖 부와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그것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힌 '야심가들'은 (그들을 뭉뚱그려 '야심가들'로 지칭하겠다.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 지칭하였다), 오로지 탐욕으로 인하여 떠밀어져 끝 닿는 곳을 모르는 시커먼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렸다. 야심가들과 그들을 지원한 권력자들에게, 바다로 나가 향신료를 포함한 동방의 진기한 물품을 가져(빼앗아) 온다는 것과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숭고한(생명 존중, 인간 존엄) 가르침은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진 것이었을까? 나가서 무슨 짓을 하던 어디를 가서 어떻게 하던 후추를 가져와라. 금은보화를 가져와라. 대포를 주고 선원(죄수로 구성된)을 줄테니... 글쎄 왜 우리는 여태 이러한 과거 역사의 모험 내지 약탈과 종교나 지성과의 관계를 생각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것일까? 어째서 우리의 역사도 아니고 저 먼 유럽의, 오로지 승자의 입장에서, 약탈자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기록들을 마치 우리의 승리의 역사인 양 오인하면서 배우고 있을까? 더더구나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유럽 제국주의의 흉내를 내며 하필 우리나라를 36년간이나 철저하게 압제한 일제에 의한 피지배의 아픈 기억이 아직도 선연히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 이 나이가 들어서도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후추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십자군 원정 이후였다.(이 책에서는 그러하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상 기술은 그렇지 않다. BC400년경 아라비아상인을 통하여 전래되었다고 한다. 어찌됐건 후추는 남인도 원산으로 중동과 유럽에서는 재배될 수 없으니, 오래전 전래되었어도 후추는 여전히 매우 희귀한 향신료였을 것이다) 아프리카 북서부에는 '후추 해안'이라는 곳이 있다. 후추와는 관계없는, '신대륙 발견' 이전에 생겨난 지명이다. 후추에 유사한 맛, 향을 내는 「멜레구에타 '고추'(Melegueta Pepper)」가 거래되던 장소다. 꿩 대신 닭인 격으로, 이 고추의 향신료로서의 가치는 충분했다고 한다. 고추를 후추라 할 만큼 후추에 대한 집착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후추를 향한 계속된 항해는 콜럼부스를 지나, 바스쿠 다가마로 계속되는데, 여기서 잠시 우리나라에 전해진 후추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실 뒤에 가려진 콜럼부스의 만행을 되돌아 봄으로써, 당시의 '발견'들이 어떠했는지를 다시금 되새겨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후추는 귀한 향신료로 취급되었다. 고려 때 이인로(1152년-1220년)의 '파한집, 돌아가시기 직전 저술, 1260년 간행'에서 처음 호초 胡椒라는 명칭이 보인다.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한 원나라 때의 선박에서도 후추가 발견되었다. '징비록'의 일화를 소개한다. 선조 때 일본사신이 우리나라 조정을 정탐하러 왔을 때 신하들이 그를 위한 주연을 베풀던 중이었다. 술잔이 돌고 흥취가 무르익자 갑자기 일본사신은 후추를 꺼내어 좌석에 마구 뿌려댔다. 그러자 자리를 같이한 벼슬아치, 악공, 기생 할 것 없이 후추를 줍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일본의 사신은 관리들의 규율이 이렇듯 문란하니 이 땅을 침략하기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후추는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서민은 천초(초피나물), 겨자, 마늘 등을 향신료로 사용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후추에 더하여, 향신료로 우리에게 필수 작물인 고추 및 몇 가지 작물들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고추는 '지봉유설, 1614년 간행, 이수광'에 기록이 있는데, 일본으로부터서 전래되어 '왜겨자(倭芥子)'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대화본초' 등에는 우리나라로부터 전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경로를 파악하기 어렵다. 마늘도 알아보자. 원산지는 중앙아시아나 이집트로 추정된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BC2500년경에 축조된 피라미드 벽면에 노무자에게 나누어 준 마늘의 양에 관한 기록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전래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단군신화 뿐 아니라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박물지'에는 "중국에는 본디 산 蒜이 있었는데, 한나라의 장건이 서역에서 이와 비슷하면서 훨씬 큰 것을 가져왔으므로 이것을 대산 또는 호산 胡산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훈채 五葷采로 산(마늘), 총 蔥(파), 구 韮(부추), 해 薤(달래) 흥거 興蕖(무릇)를 든다. 다음은 파의 전래에 대해 알아본다. 파는 중국 서부 원산이라고 하나 아직 원종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양파는 원산지가 서부아시아로 알려져 있단. 우리나라에는 조선 말엽에 미국이나 일본에서 도입되었다. 생강은 원산지가 인도, 말레이시아 등 고온다습한 아시아 지역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향약구급방(1236년 간행 추정)에는 약용식물로 기록되어 있다.
다시, 콜럼부스의 항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한다(이하 「사물의 민낯, 2012.4」에서 인용). 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3척의 함선과 120명의 선원(전부 죄수로 구성된)을 지원받고 후추를 찾아 인도를 향해 떠난다. 그는 익히 알고있는 바와 같이, 지금의 아메리카 서인도제도에 도착하여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다고 오인하였고, 당연히 그 곳에서 후추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원주민들이 가진 금붙이를 보고 후추를 대신하여 유럽으로 가져갈 욕심으로 그 곳에 30명의 선원을 남겨둔채 돌아간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후추 대신 금을 가지고 오겠다며 2차 원정을 지원받는다. 17척의 배에는 대포도 장착되었고 선원들은 칼과 갑옷, 총으로 무장되었다. 1차 원정처럼 면죄부를 전제로 여전히 범법자 선원을 모집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전직군인도 포함되었다. 그가 다시 아메리카로 돌아와 보니 남기고 갔던 선원 30명은 죽고 없었다. 갖은 행패로 인하여 식인종 부족에게 제압당해 잡아먹히고 만 것이었다. 콜럼부스는 이를 명분삼아 원주민들을 살해하고 식인종 뿐만 아니라 주변 원주민들까지 죽였으며, 그 곳의 금을 취해 귀국한다. 기대만큼 금을 가지고 가지 못한 후 3차원정에서는 맹수 사냥용 초대형 견인 마스티프(mastiff)를 가져가 원주밀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금을 바칠 할당량을 명령하고 귀국 후 4차 원정을 다시 간다. 할당량을 못 채운 원주민들은 손목을 죄다 잘리고 과다출혈로 죽어갔다. 그가 오기 전 그 많던 인구가 2년만에 500명 밖에 남지 않은 땅이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