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작가의 <천개의 파랑>은 올해 내가 읽은 소설 중 읽고 나서 마음이 가장 따뜻해지는 책이었다. 이 책은 SF소설로서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사회를 그려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여전히 희망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 두려워졌다. 나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면 빠른 기술 발전의 흐름에 뒤쳐지거나, 베티와 같은 더 효율적인 기계에 대체 가능한 노동력,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까 싶어서였다. 또 공감과 존중이라는 보편적인 가치가 흐려지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휠체어를 탄 은혜는, 주말마다 자신 때문에 집에서 자신을 돌볼 수밖에 없는 처지인 연재를 보고 미안함을 느껴, 우연히 경마장을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투데이라는 흑마는 은혜로 하여금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었다. 소아마비를 앓던 은혜가 달릴 수 없는 만큼, 투데이는 주로를 달렸고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행복한 땀을 흘렸다. 그러나 말 갈기를 휘날리며 경마장에서 인간을 위해 관절이 부서져라 달린 투데이는 인간에게 쓸모가 없어지자 마자 버려졌다. 투데이는 주로를 달리면서 살아있음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달리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에 투데이는 살기 위해 달린 것이다. 달릴 수 없게 된 투데이가 안락사를 앞둔 모습을 보고, 은혜는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마치 휠체어를 탄 자신은 쓸모가 없고, 쓸모가 없으면 행복할 수도 없다는 사회의 암묵적인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은혜의 그 말이 기억이 남는다. 은혜에게 기술의 발전은 삶의 편리함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버스와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의 개발로 더 멀리,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은 운송수단의 발달로 인해 남들처럼 평범하게 이동할 자유를 빼앗겼다. 건강한 신체를 갖고 태어난 나에게 작가의 이러한 시선은 너무나도 새롭고, 또 한편으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런 사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로봇처럼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반대로 로봇은 조금은 서투르고,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하는 비합리적인 인간처럼 그려낸다. 스카프가 목에 걸려 괴로워하는 환경미화 로봇인 스트린, 돌연변이처럼 하늘이 보고싶어져 투데이의 등에서 떨어진 기수 로봇 콜리처럼 말이다. 이렇게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릿해져가는 사회에서 작가가 건네고 싶었던 메시지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 서로는 항상 연결되어 있을 것이고, 관계의 지속을 통해서만 서로가 가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개개인을 고립되도록 만든다. 짝사랑 후 학교를 그만둔 은혜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은혜가 원하는 주말을 보내던 연재도, 남편을 화마 속에 잃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보경도 가족간 쌓여가는 오해 속에서 깊은 상처를 숨기고 살아왔다. 이 상처를 보듬는 것은 결국 대화, 소통이었다. 보경은 그리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콜리에게서 배웠고, 은혜와 연재도 투데이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콜리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훌륭한 로봇이었다. 내가 감탄한 부분은,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움과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나가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투데이가 안락사를 피하기 위해 이전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달리는 방법을 택한 것도 마찬가지다. 투데이가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행복해져야 하고,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달려야 한다. 그렇게 달리다가, 힘들면 또 멈춰서도 되고, 콜리와 같이 자신과 함께 달려주는 동반 출전자에게 가끔은 기대도 된다. 완주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다치고 힘들어 나동그라진 사람을 본다면, 나는 그 사람을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이 사회도 조금은 더 살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계기로 나는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