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에 라인 강의 대안에 거주하는 프리시족이 평화를 깼다 그들이 복속상태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로마측의 탐욕에 그 원인이 있었다 드루수스는 이 빈곤한 부족에 알맞게 그들에게 적당한 곡물을 부과했다 즉 군사상의 목적을 위해 소가죽을 공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죽의 치수나 질과 관련해서는 신경을 곧추세우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수석 백인대장 올렌니우스가 프리시족의 통치를 위임받자 그들이 납입해야 하는 공물의 표준으로 들소의 가죽을 선택했다 그것은 어떤 민족에게도 무리한 요구였고 숲속에 거대한 야수가 많이 서식하긴 하지만 집에서 기르는 가축은 적은 게르마니아족의 경우에는 특히 더 감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선 먼저 그 집에서는 기르는 소를 그 다음에는 토지를 제공하고 마지막으로는 아내와 자식들까지노예로 인도하게 되었다 이런이유에서 마침내 화가 나 불만을 제기했는데 궁핍한 상테에서 벗어날수 없게 되지 이제 남은 탈출구는 전쟁밖에 없었다 그들은 공물을 징수하러 운 로마병사들을 포박해 교수형에 처했다 올렌니우스는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도망쳐 플레붐이라는 요새에 숨었다 여기에서는 로마의 군대와 동맹군으로 구성된 얕보기 힘든 병력이 북해 연안을 방어하고 있었다 저지 게르마니아의 총독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는 이상과 같은 사실을 알게되자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에서 여러 군단의 분견대 그리고 원군 보병대와 기병대에서 선발한 부대를 불러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2개 군단을 합류시킨뒤 배를 타고 라인강을 따라 내려가며 프리시적의 영지로 진격했다 그 무렵 반역자들은 플레붐 요새의 포위를 풀고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이미 퇴각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프로니우스는 그 주변의 조류습지대를 중무장 부대가 안전하고 견실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둑길을 만들거나 다리를 놓기로 했다
그사이에 칸니네파테스족의 기병대와 우리 군의 지휘 하에 움직이고 있던 게르마니아인 보병대가 얕은 여울을 찾아 적의 배후로 우회하라는 명을 받았다 적은 이미 전열을 가다듬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맹군의 기병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군단 기병을 격퇴했다 그래서 경무장한 3개 대대를 보내고 뒤에 다시2개 대대를 얼마간 간격을 두고 원군 기병 전원을 보냈다 만약 이상의 전 군대가 동시에 습격했으면 충분히 강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격을 두고 현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 적의 전열에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그뿐만아니라 겁을 집어먹고 퇴각해 오는 아군에 되밀렸다 아프로니우스는 제5군단장 케테쿠스 라베오 에게 남은 원군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작전에 실패하고 위험에 빠지자 전령을 보내 연신 군단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먼저 제5군단의 병사들이 돌격했다 치열한 전투끝에 적군을 격퇴하고 부상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경무장병과 기병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로마의 장군은 그렇게 많은 군단의 부관이나 원군대장 상급 백인대장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복수전을 벌이려 하지도 아군의 시신을 매장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후 곧 도망병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정보가 전해졌다ㅏ바두헨나의 숲이라 불리는 성림에서 이틀가네 걸친 격전이 벌어ㅕㅈ 900명이나 되는 로마 병사가 죽었다 게다가 400명의 수비병이 전에 로마군에서 복무했던 크루프토릭스의 영지에서 부락민의 보반이 두려워 서로 찔려 죽었다 이 반란 이후 프리ㅣ시족의 이름이 게르마니아인 사이에서 일약 유명해졌다 티베리우스는 누구에게도 이 전쟁을 맡기고 싶지 않아 패배한 것을 계속 숨겼다 원로원도 제국의 먼 국경에서 로마의 명예가 훼손되든 말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보다 국내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사건에 마음을 빼앗기고 아첨속에서 구원의 길을 착고 있었다 그래서 원로원은 전려 다른 문제를 토의할 예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의 제단과 우정의제단을 쌓고 후자의 양쪽을 카이사르와 세야누스의 입상을 장식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고나서 두사람이 기회를 만들어 수도에 모습을 나타내도록 여러 번에 걸쳐 탄원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수도는 물론 근교에도 들르지 않았다 그들은 카프리 섬에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