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그 어느 것에도 덕후였던 적이 없다. 연예인, 음악, 드라마, 영화, 그 어느 것에도 푹 빠져보지 못했다. 배우나 가수를 절절하게 좋아하고, 같은 영화를 서너번 이상 보고, (재미있어서 내지는 아이맥스관에서 보고싶어서 두 번 본적은 종종 있음) 뮤지컬 그 자체나 출연 배우를 좋아해서 몇년동안 계속해서 보고, 어떤 드라마에 푹 빠져 대본집을 사고,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일련의 행위들은 내게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다. 내게는 덕후 유전자가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다.
취향도 대중적이기 그지없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항상 타이틀곡이 가장 듣기 좋고, 다들 좋다고 하는 것을 보고 듣고 먹고 해보면 대개는 좋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것은 많은데, 깊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깊이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닥 오래 가지 못한다. 여행도, 운동도, 그림그리기도, 읽고 쓰기도, 넓고 얕다. 언제나 이것 찔끔 해보다, 저것 찔끔 해보다 한다. 세상에는 뭔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겠지만, 그렇다면 나도 역시 그 쪽이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일은 드물지만, 내가 설정해놓은 이상과 현재를 비교하는 일은 종종 있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려면 꽤나 많이 알고 많이 해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뭔가를 자신있게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마이너한 무언가를 깊이 파고들어 좋아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멋져 보인다.
이렇게 대중적인 취향의 소유자에, '좋아한다'는 것 한 마디에 이렇게나 많은 생각을 하고, 고작 웹툰을 좋아하는 것을 길티플레져처럼 여기다니. 고작 이정도를 마이너하다고 여기면서 뭔가의 덕후되지 못함을 아쉬워하다니. 아니 웹툰이 길티플레져라니? 세계로 뻗어나가는 웹툰 종주국, 드라마 제작 웹툰 수십 수백편인 웹툰 전성시대, 스타 웹툰 작가들의 탄생과 웹툰 고부가가치 산업의 시대에, 마이너하다니? 언젠가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야, 그런건 길티플레져 축에도 못 껴. 남들한테 말할 수 있는건 길티플레져가 아니야.
쑥쓰럽다고 말한 건 두가지 이유에서다. 뭔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를 언제나 주저하는 인간이어서, 그리고 내가 어제 본 웹툰 제목을 다는 못 늘어놓겠어서.
전국민의 절반은 웹툰을 볼 것 같은데, 아무도 웹툰 리뷰는 하지 않는다. 친구 사이나 인터넷에서 알음알음 추천을 주고받을 뿐. 그리고 무엇보다 왠지 나의 관심 웹툰 리스트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엔 좀 뭣하지 않나.
아마도 웹툰은 로판과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가장 쑥쓰러운(?) 영역이 아닌가 싶다. 로판은 무엇인고 하니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해를 품은 달' 등이 양지로 나온 로맨스 소설이라면 그 뒤에는 무수히 많은 무명의 로맨스 소설들이 있고, 또 그 옆동네에 '로맨스 판타지' 라는 장르도 있다. 아마 마법, 환생 등의 (...)판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긴 로맨스 소설은 '제인에어', '키다리 아저씨'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등을 필두로 해서 할리퀸 로맨스, 미국과 우리나라의 '인소' 등으로 명맥을 이어온 범국가적인 장르소설이 아닌가. 트와일라잇이랑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로설이잖아요...?
로설은 로판에 비하면 고전소설이십니다.
내가 잠시 빠져있었던 건 이 로판 장르로, 불안장애가 찾아왔을 때 현실 도피처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로맨스 소설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강력하고 중독적인 것이여야만 했다. 현재 로맨스 판타지 소설 판은 회빙환(회귀/빙의/환생)키워드가 잠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밤잠을 설치고 꽤나 많은 캐시들을 소비해가며...차마 여기에 제목을 적을 수 없는... 역대 유명작들을 다수 섭렵했다.
귀여니 소설을 단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낸 어른은 로맨스 판타지에 돈을 써가며 읽게되오...
나중에 종이책으로 나온걸 보니 많은건 장편소설 열 권 분량 가까이 되는데, 아무리 내용이 쉽다지만 그걸 하루 새에 섭렵하려니 거기에 돈과 시력 깨나 바쳤을 것이다.
아무튼 이때도 또 나의 대중적인 취향은 조아라, 로망띠끄같은 마이너한 매체로 넘어가지 못하고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내의 약 15세 수위의 인기소설들을 섭렵하는 데에 그쳤다. 그조차 길지 않아서, 짧은 공황의 시기와 함께 새로운 취향은 금새 사라져버려 그 후로는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