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부분을 고려해도 지나치게 산만합니다. 서사와 사유 모두 일정한 흐름을 갖추지 못했어요. 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닙니다. 일상이 본래 그렇지요. 어떤 일이 발생할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두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을 그대로 옮겨서야 책으로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요? 널리 알려진 일기는 그래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난중일기≫, ≪백범 일지≫, ≪안네의 일기≫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생활과 사유는 산만할지 몰라도, 사회․시대적 배경이 일정한 흐름을 만들고, 거기에 근거해서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반면 이 책 ≪땅콩일기≫에는 그러한 배경이 제시되지 않았어요. 작가는 시대를 딱히 드러내지 않습니다. 소재 자체가 없는 건 아닙니다. 부모와의 관계도 제시되고, 학창 시절과 연관된 내용도 표현되었어요. 그런데 이런 내용이 이어지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제시되었을 뿐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드러내는 일이 어색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캐릭터라도 더 분명하게 보여줬다면 좋았을 겁니다. 책의 시작을 메인 캐릭터인 ‘땅콩’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음에도 구체적인 정보는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어요. 어떤 일을 하고, 누구와 살고, 사회적 관계는 어떠한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알아갈 때 근거로 삼는 내용들이 제공되지 않으니, 그저 막연할 뿐입니다.
물론 일기를 공개하지 않으면 딱히 문제는 아니에요.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이미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 그렇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캐릭터를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독백이에요.
주인공이 관계 맺고 있는 인물들을 고정해서 더 분명한 캐릭터로 표현했다면 덜 산만했을 겁니다. 웹툰 초창기 작품인 ≪마린블루스≫처럼. 반복해서 만나고, 함께 어떤 일을 해야 캐릭터가 선명해지지요. 현실에서도, 책에서도.
이런 부분이 거의 없고, 주변 인물들은 잠깐씩만 등장할 뿐입니다. 혼자서 자기 생각만 이야기하니 흥미가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아쉬움이 큽니다.
김연수의 소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는 이런 문장을 읽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나는 내가 겪은 아픔과 우울로, 땅콩이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 그러면서 내 마음도 함께 괜찮아졌다. 이런게 사랑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껏 울고 슬퍼하려고 쓰는 글>에 달린 여러 이웃님들의 댓글을 떠올렸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의 깊이 있는 위로,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장문의 글들을 통해 나는 정말 큰 힘을 얻었다.
종종 내 일기를 읽고 위로받는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사실 그게 뭔지 잘 몰랐다. 그냥 먹고 자고 노는 이야기를 적었을 뿐인데 이게 왜 위로가 될까? 근데 땅콩일기를 읽으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땅콩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느꼈던 그런 감정을 내 이웃님들이 느낀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블로그에 계속해서 일기를 쓰고싶다고.
책을 사놓고 읽지 않은 채 몇 달을 보냈는데, 그동안 쩡찌 님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재미있게 봤다. 특히 <시맨틱 에러>의 박서함 배우에 대한 애정 가득한 글과 그림들 ㅋㅋㅋ 밤낮 가리지 않고 박서함에 대한 애정을 외치는 모습으로 쩡찌 작가님을 기억해서 그런가. <땅콩일기>를 읽는 동안 수시로 슬픔과 우울을 느꼈지만 금방 빠져나왔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무엇을 위해 남들처럼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생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 뭔지 너무 잘 알겠는데, 그랬던 쩡찌 작가님이 지금은 박서함 배우를 알게 되어 전보다 많이 웃고 즐겁게 생활하고 계시다는 걸 아니까 덜 슬프고 덜 우울했다. 부디 앞으로도 좋은 것 많이 보고 좋은 사람 많이 만나며 삶의 무게를 자주 잊으시길. 그러다 마음 한구석에 고인 감정을 이따금 글과 그림으로 풀어주시면, 팬인 저는 너무나 행복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