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는 브리튼 섬이 로마에 정복되지 전 영국과 아일랜드 섬에 살고 있는 부족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등 중부 유럽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는데 2010년 켈트족이 터니 중부 아나톨리아 대평원에서 이주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니 매우 놀랍다. 영국 사람들과 터키 사람들이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니! 지금 봐서는 전혀 다른 인종 같은데 말이다. 브리튼에서 기원전 5000~4500년에 농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니 영국에 생각보다 굉장이 오래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 같다. 브리튼 섬에서 약 75만뎐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럽대륙과 이곳이 하나의 대륙이었기에 대륙 거주민들이 이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했다고 하니 오랜 옛날에는 지구 대륙이 지금와 너무나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라키 대륙이 하나로 붙어 있어다니 얼마나 많은 인류 이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졌을까? 그런데 아나톨리아 대평원에 거주하던 터키인들이 영국으로 넘어 온 시기는 브리튼 섬이 된 이후라고 하니, 터키에 살던 사람들이 굳이 배를 타고 멀리 항해해서 브리튼 섬까지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브리튼 섬을 침략했을 때 켈트족의 저항이 거센 가운데 이케니족의 여왕 보아디케이가 항복대신 죽음을 택한 것을 보면 지도자의 용기와 리더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122년부터 6년간 북쪽 타인 강부터 서쪽 솔웨이 만까지, 길이가 120킬로미터에 이르는 돌로 된 성벽을 쌓고 이 성벽이 현재까지 남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의 자연젹인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니 긴 세월의 역사가 흐른다는 것을 느낀다. 로마의 브리튼 지배 시기 동안 로마인은 런던 등 곳곳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브리튼 섬의 발전에 기여한 것 같다. 로마군이 주둔한 병영이 차후 도시로 발전하여 윈체스터, 랭커스터, 돈캐스터 처럼 -캐스터가 붙은 곳이 그런 곳이라니 300년 넘게 로마가 영국에 주둔하면서 도움을 많이 준 것 같다. 왕과 귀족들이 지배한 앵글로색슨 사회에서 왕은 각 주에 얼더먼과 주장관을 임명해 왕국을 나누어 다스렸고 10세기에는 주가 헌드레드로 다시 나뉘어져 국가 운영구조가 형성된 것 같다. 이 봉건제하에서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 여성들은 재산권과 토지를 물려받을 수 있었고 남편과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장점으로 보인다.
교황 그레고리 1세가 597년 아우구스티누스와 40여명의 선교사들을 켄트 왕국 켄터베리로 파견했을 때 갈리아 출신의 켄트 왕비가 기독교인이었고 당시의 왕 에셀버트도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잉글랜드에 기독교가 비교적 쉽게 전파되고 왕권과 교회는 상부상조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잉글랜드 여러 왕국에 기독교가 전퐈되면서 동인된 단일 조직을 갖춘 교회에서 파견된 수도사가 여러 왕국에 가서 종교를 전해주면서 단일 왕국의 필요성을 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종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도 큰 것 같다. 영국 역사에서 대왕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이로 9세기말 웨섹스 왕국의 앨프레드 대왕은 용맹함과 지혜를 갖춘 군인이자, 학자, 입법자로서 매우 훌륭한 인물인 것 같다. 바이킹의 침략 속에서 잉글랜드 통일을 이루고 앵글로색스 연대기를 편찬하여 그 당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들을 현대에 남겼다.
다시 영국을 정복한 또 다른 바아킹 정복자 윌리엄 왕은 대륙식 봉건제를 잉글랜드 사회에 심으면서 지방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중심의 중앙권력을 크게 강화한 강인한 정신력과 투지는 지닌 지배자였다. 노르만 정복 후 영어가 최하층이 사용하는 3등 언어로 전락하며 영어이 일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은 국력과 자국어가 얼마나 밀접하게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플랜태저넷 왕조를 연 헨리 2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서부 영토까지 다스린 왕으로 프랑스 왕보다 5배 이상의 영토를 보유한 왕이었으며 관습법 체계를 확립한 반면 헨리 2세의 둘째 아들인 사자왕 리처드가 죽고 그 동생인 존왕은 얼마나 무능하고 포악한 왕이었는지 어떻게 이렇게 부자가 다를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존왕과 존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헨리3세의 전횡으로 영국 최초의 성문법, 옥스퍼드 조례가 생기고 영국 의회가 발달하게 된 점은 긍정적인 역사적 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