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저자는 책 첫페이지에 먼저 알려준다. 이 책에 쓰인 언어에 관하여 라고, "이 책은 성이란 대단히 다양하며, 성을 어원적으로 구분하는 젠더화된 발상이 어불성설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런 의도가 명확하게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라고 했다.
시애틀 도심의 미래 도시 같은 스카이라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포식자를 처음 만나는 자리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뿌연 물보라 뒤로 길이 180센티미터쯤 되는 길고 날씬한 검은 등지느러미가 미국 에메랄드시티의 수중 뒤마당인 퓨젓사운드만의 은빛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다. 범고래 무리가 도시를 찾아왔다. 대단한 록스타 공연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애틀 항구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분주한 산업 항구로 카페리와 경적을 울리는 괴물 같은 화물선들이 갈지자의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혼자반 수상 교통 상황에도 고래들은 6톤짜리 킬러들만 누릴 수 있는 태평함으로 유유히 헤엄쳤다. 새끼 고래를 포함한 25마리가 분주한 만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주수지의 개들> 영화음악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형 화물선이 바짝 옆을 지나도 물속으로 몸을 피하는 대신 뱃머리의 파도를 타고 올라 대단한 카리스마를 몸소 증명했다. 정말 볼만한 장면이었다. 영어로는 오르카orca라고도 하는 범고래는 물 위로 크게 점프하면서 공중회전을 즐기고 있었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만이 아니었다. 보트 갑판은 눈을 크게 뜬 채 고래를 관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다들 카메라를 들이대며 고래가 물 위로 뛰어오를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고래관광업계에서는 오르카가슴orca-gasm이라 불리는 즐거움의 표현이다. 범고래는 돌고랫과 동물 중에서도 가장 활기가 넘치는 종이고, 몸집이 더 작은 다른 사촌들처럼 사회생활에 적합한 두뇌를 겸비한 사회적 동물이다. 이들의 7킬로그램짜리 초대형 두뇌는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언어, 사회 인지 감각 지각 같은 복잡한 사고를 처리하는 표면적이 넓다. 범고래는 5~30마리가 대가족을 이루고 살며 서로 안면이 있는 집단이 만나면 '인사 의례'를 나눈다고 알려졌다. 수면에서 두줄로 마주 보고 서서 몇 분 동안 맴돌다가 콘서트 무대 앞자리처럼 흥을 폭발시킨다. 지난 몇 년간 남부 상주군이 멸종 위기 목록에 올랐다. 이들의 유일한 먹이인 야생 연어의 급격한 감소가 주된 이유다. 추가로 해양 오염, 범고래 지방에 저장된 독성 물질, 시끄러운 해양 교통으로 인한 방향 감각 상실 등이 요인으로 손꼽힌다. 가끔 나타나서 일시적으로 머물렀다가 가는 다른 범고래 무리와 달리, 이른바 '상주군'은 여름철이면 살리시해에서 매일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움직임이 점차 예측할 수 없어지고 있다. "그래니가 죽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공식 명칭 J-2로 불리는 그래니는 J팀의 나이 든 '노할머니'였다. 이 노부인은 남부 상주군의 리더이기도 했다. 70여마리의 범고래 무리를 이 노할머니가 지휘한다는 사실은 풋내기 선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니가 몸을 일으켜 2미터짜리 꼬리로 수면을 찰싹 때리면 무리가 그 뒤를 따르거나 방향을 바꾸곤 했다. 2016년 10월 세상을 떠났을 당시 그래니의 나이는 75~105세로 추정되었고, 가장 나이 많은 범고래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연로한 여가장의 놀라운 점은 나이가 아니었다. 40세 무렵부터 더이상 새끼를 낳지 않으면서도 몇십 년을 더 살면서 생식연령보다 더 길지는 않더라도 아주 긴 세월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폐경은 동물의 왕국에서 극도로 귀한 현상이다. 사실 이론상 존재할 수 없는 단계이다. 자연선택은 생식력 소실에 가차없다. 그건 당연한 이치다. 살아 있는 목적이 번식이라면, 더 이상 신선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없는 동물은 목숨을 부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땅거북, 금강앵무, 아프리카코끼리 같은 유명한 장수 동물도 말년까지 계속 번식한다. 따라서 오랫동안 우리 인간은 폐경하는 괴짜로 여겨졌다. 생식연령 이후에도 생명을 유지한다고 알려진 유일한 포유류는 지금까지 모두 사육 상태였다. 진정한 완경은 생식기관의 노화와 신체의 노화가 분리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생식기관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5,000종의 포유류 중에서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완경에 이른다고 알려진 종은 이빨고래류 4종과 인간뿐이다. 폐경 이후의 범고래 암컷은 대게 무리에 앞장서서 헤엄치며, 특히 식량이 부족할 때 최고의 먹이터로 가족을 이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을 제외하고 범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게 분포한 포식동물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냥 기술로 이 범지구적 킬러들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특정한 먹이를 활용하게 되었다.
실리시해는 범고래가 먹을 수 있는 먹잇감이 많다. 그러나 남부 상주군은 연어 사냥에 특화되어 굶어 죽어도 다른 사냥감은 쫓지 않는다. 이들이 공유하는 바다에는 해양 포유류를 잡아먹는 다른 범고래 생태종이 살고 있으며 그 개체군은 심지어 크기가 늘고 있다. 가끔 남부 상주군 범고래가 물범 새끼와 놀고 있는 장면이 목격된다. 하지만 잡아먹을 기색이 전혀 없어 이들의 보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대체로 우리는 문화를 큰 이점을 전달하는 매개로 생각한다. 그러나 남부 상주군은 우리에게 문화적 보수주의의 위험성을 가르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기회주의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막다른 길에 들어서게 된다. 새로 탄생할 대장 암컷이 혁신가가 되어 물범과 노는 대신 물어뜯는 법을 배우는 것이 시급하다. 그것이 그들의 문화가 수천 년 전 시작된 방식일 테니 그런 행동의 가소성이 이 범고래들을 재때 구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