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9
김동환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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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인규는 1958년1월 경기도 용인 출생. 경동고 서울법대 졸업하고 1982년 사법시험 합격, 1985년 검사 임용됨. 2007년 검사장 승진후 2009.1월 중수부장으로 임명되어 노 대통령이 포함된 박연차 게이트 사건을 수사함 (‘나’는 저자 이인규를 지칭)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타계한 지 어느덧 14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온 국민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2023년 2월21일로 노 전 대통령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도 모두 완성되었다. 이제는 국민에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의 진실을 알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문 전 대통령은 당시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2011년 6월 자신의 회고록 ‘운명’에서 과거에 한 말을 뒤집고 사실을 왜곡해 검찰의 노 전 대통령 수사를 폄훼했다. 일부 민주당 정치인들은 아직고 ‘논두렁 시계’ 등을 들먹이며 검찰이 허위 사실로 모욕을 주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선동하고 있다. 이는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을 가혹하게 비난, 아니 저주했던 좌파 언론인들과 자신에게 수사의 불똥이 튈까 봐 그를 멀리했던 민주당 정치인들은 노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돌변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며 검찰에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렸고, 그들이 의미를 상실했다고 손가락질했던 노무현 정신을 입에 올리며 앞다투어 상주 코스프레 대열에 합류했다. 나(이인규 전 검사장)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는 물론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위해서도 더 이상 거짓 앞에 침묵할 수 었다. 국민의 알 권리,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도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한 거짓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여야 한다.
검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검사 취임시 하는 ‘검사의 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후배들이 나에게 검사직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 달라고 하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첫째, 수기청렴 하라
둘째,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하라
셋째, 직을 걸고 수사하라
넷째, 내부의 적을 조심하라
마지막으로 교만하지 말라
한동훈 검사는 2002년 9월경, 언론과 방송에서 “추가 상승 여력이 있다”고 매수를 추천하는 방법으로 코스닥 기업인 하이퍼통신의 주가 조작을 도와주고 2억원을 수수한 대신증권 정아무게를 구속했다. 정은 2000년 국내 최고 수익률 애널리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증권업계 파워맨이라고 할 수 있는 애널리스트가 주가 조작으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었다. 한동훈 검사는 임관된지 1년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 검사였다. 머리가 좋아 일찍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영민하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인상이었다. 특히 논리적이며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탁월했다. 검사 등 공직자에게 ‘소년 등과’, ‘초년 출세’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머리가 좋아 일찍 출세한 사람들은 ‘내가 최고’라는 교만이 있는 경우가 많다. 시기를 받아서 적도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검사로서 자세도 바르고 다른 검사들과도 잘 어울렸다. 기회가 주어져 경험이 쌓이면 크게 성장해서 검찰의 동량지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이비 벤처기업 수사에서 정점을 찍은 것은 2002년 11월경 새롬기술 오 아무게 대표의 증권거래법 위반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임검사는 이석환 검사로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검사였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고 검사로서의 자긍심도 대단했다.
새롬기술은 2000년 초에 미국 기업인 다이얼팬드와 공동으로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선전해 코스닥 시장에서 수천억원의 자금을 끌어모은 기업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해외 통화를 하는 것이 특별한 기술은 아니다. 당시에도 이 기술의 독창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000년 1월 삼성과의 제휴발표는 새롬기술 주가 상승에 기름을 부었다. 1999년 8월11일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새롬기술은 상장된 지 7개월만에 액면가 기준 560배 상승했고, 2000년 3월 시가총액 3조원으로 현대자동차를 넘어섰다. 닷컴 버블로 폭발적인 호황을 누리던 코스닥의 황제주였다. 새롬기술 오 대표는 성공한 벤처기업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무료 국제전화 기술은 별것이 아니었으며, 2000년 2월 유상증자시 재무제표를 허위로 작성해 공표했고, 허위 공시를 은폐하기 위해 자회사 자금 145억원을 동원해 다이얼패드 지분을 비싸게 매수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기도 했다. 다이얼패드는 2001년 11월 오 등이 참석한 임원회의 결정으로 파산했다. 다이얼패드 부실과 파산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 전에 새롬기술 임원진은 새롬기술 주식 240여만주를 시장에 내다 팔아 112억여권의 손실을 회피하기도 했다. 이 검사는 2002년 11월 29일 오 대표를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했다. 결국 새롬기술은 가진 기술은 없고 자본금만 많은 기업이 되었으며, 기업 사냥꾼의 표적이 되어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불법 대북 송금사건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회담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 직전 정몽헌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이 산업은행에서 4900억원을 대출받아 국가정보원 직원의 도움으로 북한 정권의 마카오 비밀계좌 등으로 4억5천만달러를 송금한 사건이다.
불법 대북 송금사건에 대해 노무현 정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문 전 대통령의 저서 ‘운명’(2011)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불법 대북 송금사건 수사는 진상규명이 우선이며, 무엇보다도 성역 없는 조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진상이 밝혀진 후에 남북관계 등 정치적 고려를 하는 것이 순서이다. 정치적 고려로 수사 대상과 범위를 임의로 재단하는 것은 수사의 순수성을 훼손하며, 그렇게 얻어진 수사 결과는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문 전 대통령의 저서 내용은 당시 송두환 특별검사의 수사가 당시 집권세력의 입맛대로 짜인 각본에 따른 수사였다고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 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법과 절차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서술했는데, 법률가 출신인 문 전 대통령의 이러한 생각을 하다니 놀랍다.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며, 목적이 정당하다고 하여 수단까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송 특검은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의 사법시험 동기로 민변 회장을 지냈고, 문 수석도 민변 출신이다.
미 의회 조사국 래리 닉시 연구원은 2012년 보고서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1999년부터 2006년 6월까지 북한 김정일에 비밀리에 10억 달러를 제공했다. 북한은 당시 극비리에 추진하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물질과 장비를 구입하는데 그 돈을 사용했다” 라고 되어 있다. 닉시 보고서가 나왔을 때 우리 정치인들은 무엇을 했나? 북핵사태 관련해 국회 청문회 한번 열지 않았다. 북한은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후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에 이어 2017년 9월까지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미국, 일본, 우리나라 등 국제사회에 자신들을 핵무기 보유 국가로 인정해 주고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핵무기 보유를 법제화하고, 핵무기로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며 우리르 위협한다. 노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장을 하려는 것에 일리가 있다 고 북한에 동조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확고한 의지가 있다 고 김정은을 옹호했다. 오늘의 북핵 위기는 일차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들을 포함한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주당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었다. 그동안 보수 정치인은 무엇을 했는가? 당리당략에 급급해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도외시한 정치인 모두의 책임이다.
2003년 3월 서울지검 형사9부장인 나는 SK부당 내부거래 수사를 통해 최태원 회장 등을 구속하고 손길승 회장 등을 불구속했다. 범죄사실은 SK글로벌의 1.6조원 상당 분식회계, SK 증권의 JP모건 관련 이면 계약으로 인한 1,112억원 손해 전가, 최태원 회장의 SK주식회사 주식 교환거래 관련 700억원 상당 부당이득 취득 등 부당내부 거래이다. 이 과정에서 16대 대선 과정에서 한나라당에 100억원, 민주당에 25억원, 대통령 선거 직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측에 12억원을 SK가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2억원 중 5억원을 노 대통령이 생수회사 ‘장수천’을 경영하면서 개인적으로 진 빚을 변제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 12억원을 받은 사람은 노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인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이다. SK 담당자는 삼성은 300억원, LG는 200억원을 한나라당에 전달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12월14일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자신이 야당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고 검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그의 정치적 수완의 탁월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4년3월8일 대검 중수부는 불법 대선자금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 한나라당 823억원, 노무현 후보 캠프 114억원 이었다.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최도술, 안희정은 나와 15년 이상 함께한 사람들로 그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기 힘들고, 그들의 보관한 돈의 선의를 믿는다. 그들의 개인적 치부는 없었다’ 라고 했다. 변호사 출신 답게 교묘한 언사로 자신의 잘못을 희석하고 정당화시켰다. 최-안 등의 범죄는 노 대통령의 지시 또는 공모에 의한 것이거나 적어도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이들의 범죄가 자신과 관련 없다는 식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이야기했다.
2003~04년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검찰은 정치적 중립성 및 수사의 독립성을 지킬 토대를 구축했다. 노무현 정권을 계승했다는 문재인 정권의 문의 저서 ‘운명’에서 밝힌 것처럼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었는가? 조국 법무부장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사건을 보라.
깨끗한 정치를 표방한 노 대통령도 구시대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대통령 비서관 최도술, 여택수 등이 검은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등 대통령으로서 권위에 큰 상처를 입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검찰에 약점을 잡힌 셈이다.
노 대통령의 검찰개혁의 일환이라는 중수부 폐지 의지는 집요했다. 결국 참여정부에서 폐지되지 않았는데, 폐지되었다면 생길 문제가 문 정권에서 일어났다. 문의 후배 이성윤, 박범계 장관의 후배 이정수 서울중앙지검장이 청와대를 등에 업고 추미애, 박범계 편에 붙어 정권의 입맛대로 사건을 처리했다. 이성윤 지검장은 채널A사건, 국회의원 최강욱 업무방해사건 등과 관련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사지휘를 거부하고 항명했다. 검찰 역사상 유례가 없다. 중수부는 2013년 4월23일 폐지되었다.
2009년1월13일 나(이인규)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부임하고,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불법 로비사건의 진행상황을 보고 받았다. 박 회장은 모 대통령에게 아들 노건호 사업자금으로 5백만달러, 노 대통령 회갑 선물로 2억원 상당 시계를 주었고, 노 전대통령에게 차용증을 받고 15억원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박 회장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태광실업이라는 대기업을 키워냈다. 2002년 12월 박 회장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정치인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박회장은 그토록 바라던 현 수입원(나이키에 신발 납품)외 다른 수입원 창출(농협으로부터 비료 원료를 생산하는 휴켐스 인수, 베트남 정부로부터 화력발전 사업허가 취득)했다.
노 대통령을 수사할 주임검사는 우병우 검사(중수1과장)로 결정되었다. 수사하는 과정에서 상기 혐의 외에 아들 노씨의 미국 주택 구입자금 100만달러 추가 수수도 알게 되었다.
박 회장은 노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금품을 제공했다고 진술했다. (1) 청와대 경비 명목으로 3억원 : 비서관이 청와대 살림살이에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제공, (2) 노 대통령 회갑을 맞아 스위스 피아제 시계 1세트 전달. 2007년 봄 청와대 관저 만찬에서 노 대통령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받음(왼손을 치켜 들고 “박 회장, 지난번 보낸 시계가 번쩍번쩍 좋은 시계입디다”), (3) 아들 노건호 미국 주택구입 자금 100만달러 (2007년6월 하순 노 대통령이 전화로 “미국에 있는 건호 집을 사줘야 하는데 100만 달러만 도와주면 고맙겠다”), (4) 사업자금 명목 500만 달러 (노 대통령으로부터 박회장이 추진하던 베트남 화력발전 사업의 편의를 받음. 2007년 12월경 노 대통령이 전화로 “우리 애들이 사업한다고 하는데 지난번 도와주기로 한 거 지금 도와줄 수 있는가?”라고 물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함. 2008년 1월 초순 베트남으로 노건호, 연철호(노 대통령 조카사위) 등이 와서 5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함. 노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노건호 등의 사업자금으로 500만달러를 대가 없이 줌. 노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 받음), (5) 차용금 명목 15억원 (2008년 3월비서관이 찾아와 “노 대통령이 봉하마을 사저 건축에 돈이 많이 들어갔다. 15억원을 빌려달라고 한다” 라고 하여 “또 뭐가 그렇게 필요하노? 참 체면 없는 사람 아이가. 그거는 정확하게 차용증 받고 빌려주라”고 지시, 같은 달 15억원을 송금. 원금과 이자를 받은 적 없음)
노 대통령은 2009년 4월 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박 회장에게 부탁한 것은 권양숙 여사와 연철호이며, 자신은 나중에 알았다며 자신은 나중에 알았다고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내용을 올렸다. 처와 조카사위를 방패막이 삼아 법적인 책임을 면하려고 한 것이다. 구차하지만 모든 책임을 처 등 가족에게 돌리고 자신은 가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상기 노 대통령의 발표에 혹독한 비난이 시작되었다. ‘뇌사모’, ‘6백만불의 사나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조중동이 점잖은 사설을 내보낸 반면, 세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등이 혹독하게 비판했다 (한겨레 사설 ‘노 전 대통령, 국민 가슴에 대못 박았다’ 등).
노 대통령은 2009년4월12일 다시 홈페이지에 ‘해명과 방어가 필요하다’며, 자신이 개입했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만 ‘증거를 대보라’는 식의 글을 올렸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가 생각난다. 그러나 이는 헛되 희망이다. 대통령이 개입하지 않고 처나 조카사위에 그렇게 큰 돈을 줄 리가 없다. 박 회장은 대통령이 요구해서 주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는데, 노 대통령의 진술은 상식에 비추어 믿기 어렵고 계속 바뀌는 등 일관성이 없어 법정에서 이길 리 없었다. 역시 언론과 여론은 노 대통령을 혹독하게 몰아 붙였다.
측근 정상문 전 비서관이 구속된 후 2009년4월22일 노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닫는다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더 이상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으니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자신을 버려야 한다’ 고 절규하듯 자신의 안타까운 처지를 호소하였다.
2009년 4월26일 노 대통령에게 4월30일 오전에 대검 중수부로 출석해 달라고 통보했다. 노 대통령은 전날 서울에 오는 방안, 헬기 탑승 등 제안을 거부하고 굳이 당일 오전 버스 이동을 고집했다. 조금이라도 늦게 검찰에 출석해 조사 시간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중수부장 사무실에 온 중수부장(나)에게 노 대통령은 대뜸 “이부장, 시계는 뺍시다. 쪽팔리잖아”. 당초 중수부에서 노 대통령에게 전달한 질문지에 시계 수수 부분은 없었는데 이는 수수 사실이 언론 등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말을 찾지 못했고 나와 노 대통령의 대화는 끝닜다.
주임검사 우병우 과장이 노 대통령에게 시계 수수에 관해 질문하니 노 대통령은 권 여사가 받았다고 진술했다. 우 과장이 “시계를 제출해 달라”고 하니 노 대통령은 “처가 이 사건 수사가 시작된 후 겁이 났던지 밖에 내다 버렸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노 대통령의 형 노건평은 ‘회갑일인 2006년9월27일 청와대 관저에서 권 여사에게 시계을 전달했다’ 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2007년 100만달러 수수 관련 질문에 “처가 박 회장에게 100만달러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미처 갚지 못한 빚이 있어 빌린 것이고, 나(노)는 검찰 수사가 시작된 후 이 사실을 알았다. 사용처는 처에게 물어 제출하겠다. 만일 우리 가족이 미국에 집을 사면 조중동이 가만히 있겠나? 말이 안되는 소리다” 라고 부인했다.
500만불 문제에 대해서 노 대통령은 “박 회장의 부탁으로 베트남 측에 베트남 화력발전 사업을 도와달라고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 기업가를 도운 것이고 박 회장에게 애들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다. 투자 등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모르며 노건호가 개입된 줄 몰랐다” 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개입하지 않았는데 별다른 사업 경험이 없는 노건호, 연철호에게 사업자금 500만달러를 투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 과장이 노 대통령에게 박 회장과의 대질을 요청하니 노 대통령은 완강히 거부했다.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는 혐의를 벗기 위해 오히려 대질을 요청하는 것이 보통인데 대질 거부는 피의자가 거짓말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대질은 대단히 무례한 것이다’ 라는데, 어차피 법정에서 마주칠 것을 왜 피하나. 대질은 무산되었지만 인사라도 하라는 검찰측 요청에 노 대통령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박 회장은 노 대통령을 보자 “대통령님, 우짤라고 이러십니까!”하니 노 대통령이 “고생이 많소. 같이 감옥가면 통방합시다”라고 했다.
5월7일 100만달러 사용처와 관련 권 여사는 “미국 집을 구입하기 위해 100만 달러를 빌렸으나 노건호의 반대로 집을 사지 못했다” 라면 기존 진술을 번복, 수수 명목이 미국 주택 구입 자금임을 인정했다. 용처는 두루뭉술 빚 갚는데 등에 사용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의 신병처리가 늦어진 것은 미국 주택 구입사실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주장대로 ‘노 대통령에 대한 4월30일 조사후 증거가 없고 공소 유지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노 대통령 조사후 추가 금품 수수와 미국 주택 구입 사실이 새로 드러나는 바람에 이에 대한 추가 수사에 약 3주라는 시일이 더 소요되었다. 그러는 사이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했다.
4월30일 수사팀은 미국 관련기관에서 ”노 대통령 딸 노정연이 2007년 9월 미국에 5만 달러를 송금했다“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상문 전 비서관이 ”권 여사가 박 회장에게 40만 달러를 추가로 도와달라고“ 실토하여 노 대통령이 주택 구입 자금 명목으로 받은 돈이 140만 달러로 늘어났다. 결국 노씨 일가가 미국 주택을 구입한 것은 사실이며, 노정연은 현금 13억원 전달과 관련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권 여사는 기소하지 않았다. 검사가 노정연에게 노 대통령 재직 중 급하게 미국의 주택을 구입한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아버지가 현직에 있을 때 돈을 주지, 그만둔 후에 누가 주겠냐고‘ 해서 그때 구입하게 된 것“이라는 취지로 대답했다. 5월14일 언론은 노정연이 구입한 미국 주택이 뉴욕 맨해튼 마천루 빌딩이 마주 보이는 허드슨강가에 있는 방3개짜리 호화 콘도라고 보도앴다. 노 대통령은 더 이상 항변할 수 없었다. 노 대통령 측에서 주택 관련 지급한 돈은 145만달러와 13억원(100만달러 환치기)으로 총 245만달러로 추정된다. 13억원의 출처는 확인되지 않았다(노 대통령의 비자금 이라는 설이 있음). 5월20일경 140만달러 수수 경위 및 미국 주택 구입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권 여사에게 ”5월24일 부산지검으로 출석하라“고 통보했고, 출석 하루 전 노 대통령이 김해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명박 정권은 노 대통령 수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2009년 4월청와대 민정수석이 박 회장이 돈 준 사람중 친박 의원을 없는지 물었고 ’노 대통령을 불구속하되 명품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도덕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 어떤가‘라며 나에게 물었고 나는 ’수사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이미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파산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선거 기간은 물론 재임 기간 내내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큰 소리친 노 대통령이다. 이 대통령은 겉으로는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배려한다는 제스처를 보이고, 속으로는 노 대통령을 망신주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저 ’시계는 밖에 내다 버렸다‘를 자극적인 ’논두렁에 버렸다‘ 바꾼 것은 국정원의 작품이다. 노 대통령의 변호인인 문 대통령도 이 ’논두렁 시계‘의 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4월30일 노 대통령 검찰 조사때 배석했다. 그러나 저서 ’운명‘에서 ’논두렁 시계라는 소설을 통해 사법처리가 여의치 않으니 언론을 통한 망신주기 압박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고 했다. 검찰은 ’논두렁 시계‘ 언론 보도에 개입한 적이 없다. 문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저지른 비리의 실체를 은폐하고 검찰을 악마화하려 했다. 유시민은 노 대통령에게 직접 들었다며 ’권 여사가 받아 보관하다가 이를 안 노 대톨령이 화가 나 망치로 시계를 깨부수었다‘라고 했다. 도대체 유시민에게 진실은 존재하는가?
문 대통령은 2009년6월1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사건을 놓고 검찰을 원망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다. 조사 과정에서 대통령이 성의있게 임했고, 검사들도 대통령에 대해 충분이 예우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운명‘에서 ’이인규 중수부장은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가 거만함이 가득했다‘며 한겨레 인터뷰 내용을 부인한다.
노 대통령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미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만일 유죄 판결을 받으면 최소 10년 이상 징역과 뇌물 640만 달러 추징, 640만달러의 2배 이상 5배 이하 벌금이 부과되어 경제적으로도 파탄이 날 지경이다. 노 대통령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형국이었다. 더욱이 극단적 선택을 할 당시 노 대통령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대통령은 단순히 변호인이 아니고 노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였다. 그럼에도 검찰 수사로 고통받는 노 대통령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운명‘에서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일주일간 따로 봉하에 가지 않았다. 다른 일정이 없었지만 굳이 갈 현안이 없었다‘라고 했다. 검찰의 다방면 압박 수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현안이 없다닌 말도 안되는 변명을 했다.
극단적 선택을 할 당시 노 대통령은 미국 주택 구입 사실이 밝혀져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나, 건강이 좋지 않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특히 한겨레 등 진보 언론은 그를 가혹하게 비판, 아니 저주했다. 주위를 둘러 봐도 가까운 사람은 모두 등을 돌리고 믿었던 친구이자 동지인 문 대통령마저 곁에 없었다. 이것이 노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문 대통령은 변호인으로서 무능했다. 부인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당당함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야 했다. 형사사건 변호인은 수사 검사를 방문해 수사 내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처 방법 등 변호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기본이다. 문 대통령은 나 포함 수사 검사 누구에게도 연락하거나 찾아간 적이 없다. 노 대통령에게 유리한 사실을 주장하고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서 한 장 제출한 적 없다. 문 대통령은 제대로 된 변호 전략도 없이 검찰을 비난하고 막무가내로 범죄를 부인한 것 밖에 없다. 변호인으로서 검찰의 솔직한 입장을 묻고 증거관계에 대한 대화를 통해 사실을 정리했더라면 노 대통령이 죽음으로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09년6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살 직후여서 앞뒤 잴 겨를이 없었을테니 이 말은 그의 진심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1년 저서 ’운명‘에서는 ”대통령의 죽음은 정치적 타살이나 진배없었다“라고 말을 바꾼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문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운명‘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청와대와 법무부에서 박연차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하라고 채근했고, 2009년6월12일 박연차 불법로비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의 혐의는 인정되지만 사망하여 공소권 없음으 결정하였고, 수사 기록은 영구보존 기록으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노 대통령의 검찰조사 장면을 녹화한 CD를 수사 기록 끝에 첨부했다. 나는 2009년7월14일 24년여 몸담은 검찰을 퇴직했다.
나는 2012~2013년 두 번에 걸쳐 우병우 검사의 검사장 승진을 부탁했으나, 우 검사는 검사장 승진에 실패했고 결국 검찰을 떠났다. 우 검사는 2015년1월 민정수석으로 발탁되어 박 대통령이 우 검사의 능력을 알아본 것이다. 2016년12월 박 대통령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우 민정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야당의원의 질문에 “존경한다. 훌륭한 분”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해, 청문회에 불려나온 고위 관료들의 비겁하고 초라한 모습과는 달랐다.
노 대통령의 수사는 대한민국 정의와 법질서 수호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검사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