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9
김영준
쉽게 읽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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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일리아드만큼 강렬한 첫 구절을 가진 책을 찾으라면 굉장히 찾기 힘들 것이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긴 호흡의 문장에 만연하게 들어찬 표현, 그리고 오페라나 고전 연극에서 쓰는 등장인물들의 화법과, 곳곳에 작가의 감정이 드러나는 이야기식 전개는 그 어떤 소설도 갖지 못한 매력이라고 할 만 하다. 요점이 바로 그렇다. 분명히 '아는 내용'이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사소한 다툼에서 불거진 그리스 군의 분열과,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불러온 아킬레우스의 재참전, 헥토르의 죽음, 그리고 프리암 왕이 시체를 되찾는 과정 모두, 이미 아는 내용이기때문에 다음 내용이 기다려진다거나 하는 즐거움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일리아드의 즐거움은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책으로 읽은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화로도 꼭 보게 되고, 거기서 오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명작은 여러 가지 버전으로 각색되고, 재창조되기 마련이며, 그 하나하나가 색다른 즐거움이며, 그 즐거움은 다 안다고해서 변질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장르에서는 중요 사건을 강조해서 다루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홀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설의 이야기꾼 호메로스는 그 강렬함을 아킬레우스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명의 영웅들에게도 똑같이 부여했다는 점이 그 매력이다. (그렇다고 아킬레우스의 강렬함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 몇 페이지에 걸쳐 나오는 빠른 속도의 전개가 파죽지세로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아킬레우스의 강력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른 영웅들, 특히 이어지는 오딧세이아의 주인공인 오딧세우스의 등장도 많았지만, 나는 이 '디오메데스'라는 캐릭터에 훨씬 많은 애정이 갔다. 신에게도 덤벼드는 용기와,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여 중과부적일 때는 후퇴하고, 자신보다 지략이 뛰어난 아군에게는 부끄럼 없이 도움을 청하며, 위험한 임무에도 가장 먼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여자를 뺏겼다고 삐진 어떤 영웅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그러나 디오메데스는 분명 영웅이었지만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은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많은 주연이 있지만, 그중 역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대립 구도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일 것이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을 종결짓는 '오딧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최종 승리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승리를 쟁취해간 그리스 군이다. 그러나 디오메데스는 활약만 많았을 뿐 위의 인물들에 비하면 기억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디오메데스는 전체적으로 많은 활약을 했지만, 어느 진영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어중간한 능력에 관해서이다. 물론 전쟁에서 승리의 요소라면 단연코 첫 번째로는 강한 화력을 꼽을 것이다. 고대에는 강한 전사 개인의 능력이, 그리고 현대에는 자원과 무기에서 나오는 힘이 그것이다. 그 '조커'로 트로이에는 헥토르가, 그리스에는 아킬레우스가 있었다. 둘 다 정말 압도적인 힘이며, 전쟁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제 1요소였다. 물론 오딧세우스의 지략이 트로이 전쟁을 종결시키게 되었지만, 모든 전쟁에서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를 극복하는 지략이란 손에 꼽을 정도이고, 그 지략이란 먼저 두 진영 간의 힘 차이가 근소할 때 빛을 더욱 발하는 법이다. (실제로 아킬레우스가 죽지 않았다면 트로이는 아킬레우스의 칼 아래 멸망했을 터이고, 오딧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제작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디오메데스는 어중간했다. 아킬레우스를 제외하고도, 카리스마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부족하고, 지략은 '오딧세우스'에게 밀리며, 힘은 '아이아스'에게 뒤쳐졌다. 심지어 경력이나 경험에서도 '네스토르'가 고문으로써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결국 디오메데스는 전체적인 능력치가 평균치 이상일 뿐, 어떤 상황에서도 쓰기 좋은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엄청난 장점인지도 모른다! 내가 추구하는 자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캐릭터로써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