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1
김승용
유럽도시기행2-빈부다페스트프라하드레스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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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 또는 동기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이는 단순히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해서, 다른 어떤 이는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경험하기 위해서, 이처럼 여행의 목적과 동기는 다양하며 그 동기에 따라 여행의 목적지가 결정나는 것이 상례이다.
자연에 파묻혀 일상을 잊기 위해서라면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경관이 좋겠지만 색다른 경험을 위해서라면 다른 국가,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목적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그 기간이나 거리와는 무관하게 여행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한가지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정치인, 방송인 등 다양한 활동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이지만 스스로를 작가라고 소개하는 저자가 두번째 유럽도시기행문을 출간하였다. 그가 출연했던 TV 예능프로그램 '알쓸신잡' 에서도 보이듯이 저자는 지적 호기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기에 아마도 여행의 목적을 새로운 문화에 대한 배움과 경험에 두는 듯하다. 전작에 담긴 저자의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여행 목적은 명확해 보인다. '도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일 뿐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 도시의 텍스트도 해석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응답하려면 '콘텍스트'를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언급된 텍스트나 콘텍스트는 우리 말로 옮기기에 적당한 말이 없다. 텍스트는 단순히 문자로 이루어진 책이나 게시물 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상도 텍스트이며 정치인의 성명, 입장문 등 말도 텍스트이고 길, 공원, 건축물 등도 텍스트에 포함된다. 텍스트는 해석이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콘텍스트는 텍스트가 이야기하는 바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총칭한다. 산, 바다와 같은 자연경관과는 달리 도시는 인간이 사회라는 집합체를 통해 만든 공간이기에 무수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품고 있다. 평소 텍스트와 그에 대한 콘텍스트에 관심이 많았던 개인적인 취향 덕분인지 이러한 유형의 여행기를 선호한다. 저자의 이번 여행지 중 눈길이 가는 텍스트와 그에 대한 콘텍스트를 몇가지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저자의 전편의 여행이 문명의 중심지였던 그래서 그 규모도 방대했던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등 지리적으로 거리가 있었던 도시들에 대한 기행이었던 반면, 이번 여행은 중부 유럽의 중심 도시인 빈을 중심으로 인접한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등 지리적, 역사적 공통점을 가지는 도시들에 대한 여행이었다.
빈의 '링스트리트'는 빈 중심가를 감싸고 있는 도심 순환도로이다. 링스트리트라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대성벽과 합스부르크 왕가,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그의 부인 엘리자베드 아말리에 오이게니라는 콘텍스트를 알아야 한다. 원래 링스트리트 자리에는 대성벽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궁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 그래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으로부터 서유럽의 안위를 지켜낼 수 있었던 요새였지만 무기체계의 발전으로 전쟁의 양태가 바뀌어 버린 19세기말 그 용도를 상실하였다. 그 대성벽을 허물고 도시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링스트리트이고 그러한 일이 가능토록 결정한 황제가 요제프 황제이며 그 시절 황후로써 오스트리아 국민의 사랑을 아직까지 받고 있는 비운의 여인이 '시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엘리자베드 황후이다.
시씨는 합스부르크 제국시대 빈의 대표 인물이다. 시씨는 당대 유럽의 대표적인 '권력형 셀럽' 이었다. 20세기 권력형 셀럽으로 꼽히는 재클린 케네디,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왕비, 영국의 다이아나 황태자비의 원조격이라 보면 된다. 시씨는 어린 나이에 선택했던 황후의 지위를 버거워했고 자신에게 맞는 삶을 찾으려고 그 둥지를 떠났다. 황실의 숨 막히는 분위기와 따분한 의전에 넌더리가 난 시씨는 남편과 여배우의 연인관계를 용인해주고 빈을 떠났다. 부다페스트 교외의 여름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헝가리 말을 익혔고 헝가리 옷을 입었으며 헝가리 시녀의 보살핌을 받고 헝가리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었다. 시씨의 유별난 헝가리 사랑은 '언드라시' 백작과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헝가리 무장독립투쟁의 지도자 언드라시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고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언드라시가 긴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갑자기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헝가리 자치를 허용해 달라고 제안했을 때 시씨는 호감을 품었던 듯하다. 요제프 황제와 언드라시 백작은 1867년 헝가리 왕국의 국방, 재무, 외교를 제외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출범시켰다. 황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왕을 겸했고 언드라시에게 헝가리 총리와 제국의 외교장관 자리를 주었다. 제국의 변방이었던 헝가리는 국가의 지위를 얻었다. 그 놀라운 정치적 반전의 배후에 시씨가 있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시씨와 언드라시가 연인관계이었는지는 몰라도 언드라시와 시씨를 뻬놓고는 헝가리 공화국의 독립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러한 콘텍스트를 반영하 듯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민족의 자존감과 열등감을 보여 주는 건축물 중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 광장에 언드라시 기마상이 서 있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 한편에서 시청사 쪽을 바라보고 있는 얀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교수보다 살기 편해 보여서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적당히 인생을 즐기려 했던 그는 종교 의전에서 라틴어만을 쓰라는 로마 교황청의 지침을 무시하고 민중의 언어인 체코 말로 설교하였다. 믿음의 근거를 교회가 아닌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범죄행위와 부정부패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이단으로 간주되어 모진 고문 끝에 화형을 당했으나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100년 뒤에 이어진 종교개혁 운동 및 그에 따른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네델란드와 스웨덴의 독립을 통해 유럽에 국민국가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성모교회로 대표되는 드레스덴은 인간의 부족본능에 의한 비극을 대표한다. 1945년 2월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영국과 미국 공군은 드레스덴을 네차례 번갈아 융단 폭격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성모교회를 포함해 드레스덴 구시가의 건축물과 광장과 공간은 모두 복원하거나 신축한 것이다. 중세와 근대, 사회주의 시대, 통일 이후의 건물이 뒤섞여 있는 드레스덴의 현재는 과거의 역사와 아픔을 투영하는 것이다.
다른 국가, 도시를 방문하면서 우리는 낮선 사람과 익숙치 않은 풍경을 만난다. 이를 통해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과 갚이를 더할 수 있다. 전 인류적인 공감대가 확산된다면 인간 세상을 지배해 온 부족본능에 의한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