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31
신지훈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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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27년생 작가가 세계 2차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을 뻔 했던 자신의 경험과 그 이후 결혼하여 극적으로 미국으로 이민가서 가난한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회고록인 동시에, 10대 때 겪은 수용소 생활에서 비롯된 상처를 평생에 걸쳐 치유하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심리학 임상 보고서이기도 하다. 또한 상담치료자로서 내담자들과 상담하면서 그들이 변화화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가 거의 만 95세여서 시간적으로 이야기할 소재가 많기도 하거니와, 겪은 삶의 시대적 배경이 세계2차대전 및 소련의 주변국에 대한 공산화 움직임이 심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전승국인 미국에서 가난한 이민자로 겪은 삶, 본인의 이혼 및 재결합, 평범하지 않은 내담자들의 상황이 워낙 극적이어서 책 분량이 약 500쪽이나 되지만, 책이 금방 읽힌다.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이야기들은 모두 인상적인데다 충격적이어서 제외함)
242쪽 :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도망치는 방법으로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도망은 고통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미국에 온 후 나는 수용소로부터 지리적으로 어느 때보다 더 멀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이전보다 마음 감옥에 더 갇히게 됐다. 과거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에서 나는 자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두려움의 감옥을 만들었고 침묵으로 감옥의 자물쇠를 봉했다.
274쪽 : “ (아들) 조니는 다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더 오래 걸릴 뿐이지요. 조니를 지나치게 밀어붙인다면 역효과가 날 겁니다. 하지만 충분히 밀어붙이지 않느다면 그 또한 문제입니다. 당신은 조니가 가진 잠재력이 온전히 발휘되는 수준까지 조니를 밀어붙여야 합니다. ” 나는 학교에서 중퇴했다. 조니를 언어치료 수업에 데려가고, 작업치료 수업에 데려가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클리닉에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나는 우리의 아들이 영원히 위태로운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했다. 나는 우리가 믿어주기만 한다면 조니가 잘 자랄 수 있다고 확신했다.
280쪽: 1966년 가을, 여명이 밝아올 무렵에 나는 프랭클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인 이 부분을 읽는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잇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매 순간은 선택이다. 우리의 경험이 얼마나 불만스럽든 지루하든 제한적이든 고통스럽든 억압적이든 간에 우리는 항상 어떻게 대응할 지를 선택할 수 있다. 마침내 나는 나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나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296쪽: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나는 ‘나 스스로’ 떠나기로 선택한 남편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다. 하지만 폭풍우 같은 불안정한 상태는 자기 갈 길로 간 듯하다. 불안전한 상태는 영구적인 특징이 아니다. 내 상태는 움직이고 변화한다. 나는 더 안정된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와 같은 낮과 밤을 수없이 더 보낼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에 나는 내 감정들을 밀어내지 않는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매우 고통스럽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이혼이 내게 준 선물이다. 나는 내가 나의 내면에 있는 것과 직접 마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싶다면 변해야 하는 것은 벨러도 우리의 관계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320쪽: 나는 이 분노를 표현하고 싶다...나는 바닥에 주저 앉는다...소리를 지르려고 애쓰지만 그럴 수가 없다. 너무 무섭다. 몸을 웅크려 점점 더 작은 공이 된다...그 순간 내게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매우 길고 거세고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소리여서 나는 깜짝 놀란다. 지독하게 상처 입은 어떤 존재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비명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기분이 좋다. 30년 이상 된 침묵의 유령들이 지금 내게서 괴성을 지르며 나오고 있다. 나의 슬픔이 크게 소리치며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분이 좋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또 비명을 지른다. 나를 누르고 있는 무게를 힘껏 밀어 젖힌다....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하지만 이 순간 이후로 나는 감정들은, 얼마나 강력할지는 몰라도 결코 죽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감정들은 일시적이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감정을 떠나보내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표현은 우울의 반대말이다.
356쪽: 권총을 들고 복수를 갈망하다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고서 제이슨은 갑자기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죽이기로 선택할 수도, 사랑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었다. 정복하거나 포기하거나, 슬픔과 맞서거나 고통을 대물림하거나, 그는 총을 떨어뜨렸다. 그는 이제 울고 있다. 커다란 흐느낌이, 슬픔의 파도가 그의 몸을 덮쳤다. 그는 그 거대한 감정을 버틸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주저 앉았고 머리를 숙였다...아픔과 수치심과 무너진 자존심, 훼손된 신뢰, 외로움, 그가 될 수 없고 절대 되지 않을 어떤 남자의 이미지 등이었다. 그는 절대 지는 법이 없는 남자가 될 수 없다. 항상 그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맞고 조롱당하던 남자일 것이고, 아내가 바람을 피운 남자일 것이다. 항상 내가 엄마와 아빠가 가스실에서 죽고 불태워지고 한 줌의 연기로 사라진 여자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제이슨과 나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늘 고통을 견뎌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리고 어떠한 일이 우리에게 행해졌는지 받아들인 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이슨은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사랑했고 의지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거나 우리를 낙담시켰다. 그를 안아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를 안아주었다...
374쪽: “...과거는 제 안에 살아 있습니다. 제가 살아남아서 해방을 맞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가슴 안에 희망의 불씨를 살려뒀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용서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다고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기가 더 쉽다....그는 내게 생존자로 나서서 나의 몫(배상금)을 찾으라고 권유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올바른 선택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마치 피 묻은 돈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하면 우리를 파괴하려 했던 사람들과 영원히 묶여 있게 될 것처럼 느껴졌다.
375쪽: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과거로부터 감옥을 만들어내기 쉽지다. 하지만 기껏해야 복수는 아무 소용없을 뿐이다. 복수는 우리에게 행해진 일을 바꿀 수 없고 우리가 겪은 고통을 지울 수 없다. 죽은 이들을 되살릴 수도 없다. 최악의 경우, 복수는 증오의 사이클을 영구화한다. 복수는 증오가 계속해서 순환하게 만든다. 복수를 노릴 때, 그것이 비폭력적인 복수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나는 어제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여기에 온 것이 건강한 종류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마땅한 벌을 내리고 보복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베르크호프의 절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복수는 나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히틀러의 옛집이 있던 자리에 서서 그를 용서했다. 이것은 히틀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나를 위해 한 일이었다. 나는 평생 정신적, 영적 에너지를 있는 힘껏 쏟아 히틀러를 내게 묶어 놓게 만든 나의 내면을 떠나 보내고 놓아주었다. 내가 그 분노에 계속 매달리는 한 나는 고통스러운 과거에 갇힌 채, 나의 슬픔 안에 갇힌 채 히틀러와 영원히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용서하는 것은 슬퍼하는 것이다. 일어난 일에 대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그런 다음 다른 과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삶을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현재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히틀러가 600만명의 사람들을 살해한 것이 용인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내가 지키고자 하는 삶, 내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삶을 파괴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399쪽: 하지만 그 때 나의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네 안의 광신자를 발견하라.’ 나는 그 목소리를 잠재우려 애썼다. 나는 내가 광신자일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많은 반박들을 늘어 놓았다. 나는 한 푼도 없이 미국에 왔다. 나는 공장에서 동료 흑인 노동자들과 함께 ‘유색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했다. 나는 인종차별정책을 종식하기 위해 마틴 루터 킹 박사와 함께 행진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계속됐다 ‘네 안의 광신자를 발견하라.’ 너의 내면에서 다른 사람을 판정하고, 딱지를 붙이고,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폄하하고,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는 부분을 찾아라.
406쪽: 이제 우리 차례다. 멩겔레 박사가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그녀는 네 엄마니 아니면 네 언니니?” 그가 묻는다...나는 나의 의식에서 지우려고 애쓰며 평생을 보내게 되는 바로 그 말을 내뱉는다. 심지어 오늘까지도, 내가 나에게 기억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바로 그 말을 말이다. “엄마에요” 내가 말한다...나는 그 질문의 중요성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네 엄마니 아니면 네 언니니?’ ‘언니에요! 언니에요! 언니에요!’ 나는 소리치고 싶다. 멩겔레가 엄마에게 왼쪽으로 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엄마가 어린아이들, 노인들, 임신한 엄마들, 팔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들의 뒤를 따른다... “엄마!” 내가 소리친다...엄마가 몸을 돌려 나를 쳐다 본다. 나는 엄마의 빛을 느낀다. 엄마가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바라본다. 엄마가 미소를 짓는다. 희미한 미소다. 슬픈 미소다. “‘언니에요’라고 말했어야 했어요! 왜 제가 ‘언니’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수십 년 건너에서 엄마에게 외치며 엄마의 용서를 구한다. 이것을 받기 위해 내가 아우슈비츠로 되돌아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가 나에게 내가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해주는 것을 듣기 위해서.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말해주는 것을 듣기 위해서.
408쪽: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아니 엄마가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치를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순간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바로 전 순간과 이 순간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처음부터 다시 모든 순간을 기꺼이 살아낼 것이다. 모든 선별 줄, 모든 샤워, 얼어 죽을 것처럼 추운 밤과 점호시간, 모든 식사, 연기로 시커멓게 된 공기의 냄새, 거의 죽을 뻔하거나 죽고 싶었던 모든 순간을 말이다. 멩겔레의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409쪽: 만약 엄마가 그날 돌아가실 것을 알았다면 나는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혹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엄마를 뒤따라 샤워실로 들어가 엄마와 함께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잘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그런데도(이 ‘그런데도’는 마치 문처럼 활짝 열린다). 삶은 죄책감과 후회의 장광설이 되기 얼마나 쉬운가. 똑같은 코러스가 계속 울려 퍼지는 노래가 되기 얼마나 쉬운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말이다. 우리가 살지 못한 삶은 우리가 선망하는 유일한 삶이 되기 얼마나 쉬운가. 우리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환상에 빠지기 얼마나 쉬운가. 우리가 할 수 있었던 혹은 해야만 햌ㅅ던 행동이나 말이, 만약 우리가 그렇게만 했다면 고통을 치유하고, 고난을 지우고, 상실을 없앨 수 있었으리라 착각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410쪽: 내가 엄마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럴지도. 그렇다면 나는 암은 평생을 그 가능성에 매달려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잘못된 선택을 내린 것에 대해 자신을 책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특권이다. 혹은 나는 더 중요한 선택은 내가 굶주리고 겁에 질렸을 때, 우리가 사냥개들과 총들과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었을 때, 내가 열 여섯 살이었을 때 내린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있다. 더 중요한 선택은 내가 현재에 내리는 선택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불완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이다. 또한 나 자신의 행복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선택이다. 나의 결함을 용서하고 나의 결백을 되찾는 선택이다. 왜 내가 살아남았는지 묻기를 멈추는 선택이다. 최대한 열심히 살고, 헌신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부모님을 기리고, 부모님이 헛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선택이다. 나의 제한된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미래 세대들은 내가 겪은 일을 겪지 않도록 하는 선택이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고, 있는 힘껏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살아남고 번영해서 모든 순간을 이용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선택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는 선택이다. 과거를 만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다음 과거를 떠나 보내는 선택이다. 나는 우리가 모두 내릴 수 있는 선택을 내릴 수 있다. 나는 결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구원할 수 있는 삶은 있다. 바로 나의 삶이다. 내가 바로 지금 사는 이 삶, 이 귀중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