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4
조명철
철학의 위안(현대지성클래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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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티우스로 말하자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아있는 동안 한 때나마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려본 사람들을 한 데 모아 그들이 누렸던 온갖 좋은 것들의 크기를 각각 재어 그 순위를 매겨보아도(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리 낮은 위치에 자리하지 않을 정도의 위치를 소유하였던 사람이었고, 그의 지적 수준이 보여준 우아함과 당대의 지식세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최고의 저작들로 인하여 부여받은 명예 또한 여태까지의 그 누구에 뒤처지지 않았으며, 더구나 자신의 영광이 자식들에도 이어져 자식들 또한 보에티우스 못지 않은 지위를 누렸던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남부러울 것없는 위세와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었으나, 운명의 장난인지 한 순간에 그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감금되는 수난을 겪으며, 세상의 정의와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에 이르러 깊은 절망에 빠진다. 현대에 사는 우리 보통의 사람들도 때로는 원망에 이르기도 하는 세상사 모순에 대하여, 그 처럼 인생이 말년에 이르러 급전직하 한다면 아무리 그 인격 및 지식의 정도가 현인, 현자에 이를 사람이라도 어찌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일순간에 회의의 밑바닥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락으로 인한 추락이 노년과 함께 느닷없이 닥쳐오면 젊은사람에게 있어서와는 그 충격이 더욱 극심할 것이고, 그 회복은 아마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며, 결국 한탄, 회한으로 침침해진 눈으로 노년의 쓸쓸함을 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제 불행의 재촉을 받고
아무런 경고 없이 늙음이 나를 찾아왔고
슬픔은 비탄의 노년을 내 안에 새겨 놓아서,
내 머리 위에는 때 이른 백발이 뿌려졌고
나의 축 처진 사지에는 피부가 늘어져 있구나.
죽음이 달콤하고 즐거은 시절에는 물러서 있다가
비탄에 잠겨 시도 때도 없이 울부짖는 자에게만 찾아와 준다면
정말 다행이련만,
불행에 절어 있는 자로부터는
매정하게도 귀를 막고 돌아서 버리고
야속하게도 애곡하는 눈을 감겨 주려 하지 않는구나.'
이때, 보에티우스에게 철학의 여신이 찾아온다. 인간은, 신에 의해 주어진 만물의 목적을 쉽게 잊어버리기에, 오로지 권력과 부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살아있는 동안은 그것들은 꼭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하는 유일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철학은 말한다. '운명이 인간에게 행운으로 찾아왔을 때에도 인간은 진정으로 귀하고 소중한것을 결코 얻은 것이 없었고, 운명이 인간에게서 떠나갔을 때에도 그런 것을 결고 읽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72쪽) '운명이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기 시작한다면, 운명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76쪽) 운명이라는 것은 원래 그것이 어디로 향할지 결정권이 운명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지 않다. 운명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이미 운명이라고 이름붙일수 없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그러나, 보에티우스처럼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귀영화의 최고 정점에서 느닷없는 운명의 희롱으로 감옥이라는 가장낮은 위치로 인생의 극적 추락을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일상적인 상식적인 인간 또한 습관적으로 낙담하고, 체념하면서 인생의 목적을 잊어버리고는 마치 마음속에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재물과 명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것들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음에 끊임없이 절망한다.
'행복'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장 좋은 것'이다. 그 행복이 소유와 명예에 전적으로 매여 있다면 운명이 주는 현세적 보물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운은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그 행복이 언젠가는 자기에게서 떠나갈 것임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무지 가운데서 아무것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설사 안다하더라도 늘 자신의 행복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 역시 행복은 있을 수 없다.'(93쪽)
'하지만 불타는 물욕은
에트나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보다 더 강렬하다.
땅 속 깊이 감춰진 황금과
그토록 발견되지 않기를 원했던 보석들,
그 위험천만한 물건들을 처음으로 캐낸 자는
대체 누구였던가.'
그러나, 보석을 예로 들어자. 보석의 찬란한 광채가 우리의 두 눈을 유혹하고, 아무리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일지라도, 보석은 보석일 뿐이고 사람이 아니다. 보석은 정신도 없고 육신도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과 생명이 있는 인간이 그런 물건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석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에는 휠씬 미치지 못하는 물건일 뿐이어서,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97쪽) 재화, 명성에 대한 모든 욕심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여 진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났듯이, 돌아갈 때도 결국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고 말하여 진다. 그럼에도 인간적 심정은 조금더 가질 것을 욕구하고, 끊임없이 찾아헤맬 수 밖에 없는가 보다.
하지만 누군가의 소유가 다른 누군가에로 이전할 때 이전 소유자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빼앗겨야만 하지 않는가, 어느 누구 다른 이의 소유를 가져오지 않고서 없던 재물을 새로 소유할 수는 없지않는가? '재물은 가혹한 것이다'(97쪽)는 말에 많이 공감이 간다. 비단 재물에만 국한된 말은 아닐 것이다. 명예에도 명성에도 적용이 될 것이나, 아무래도 재물에 대하여 의미가 쉽게 다가오는 것같다.